안동전탑의 원류를 찾아서(글/임세권)'讓世界認識西安, 讓西安走向世界'
7월 9일, 중국의 서안에 도착해서 처음 본 것은 길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이 표어이다. '세계가 서안을 알게 하고 서안은 세계를 향해 나가자'는 뜻이다. 이후 다른 도시를 찾으면서 이 표어는 도시 이름만 바뀔 뿐 중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개혁개방의 시대를 지나 세계화의 시대로 들어선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늘 기온이 섭씨 39도. 10년만에 찾은 서안은 살인적 더위가 온통 세상 전체를 찜통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중국에서는 일기예보에서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40도 이상을 발표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40도가 넘으면 관공서가 휴무를 하고 학교도 휴교를 하도록 되어 있어 가능하면 40도가 넘더라도 39도로 발표하는 것이 상례라고 한다. 그러니 39도라지만 실제로는 40도에서 얼마를 더 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중국 여행은 경북 안동지역에 집중 분포된 전탑(塼塔)에 관한 문제를 풀어보자는 안동 문화방송의 특집프로 제작의 자문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불교가 그러한 것처럼 전탑도 중국에서 전래되었다. 문제는 전탑이 왜 안동지역에만 집중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여태껏 아무도 명쾌하게 풀어준 사람이 없었다. 또한 내가 나선다고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의 제작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이 전탑의 문제가 안동에 사는 지난 20년간 지속적으로 내가 해결해야 할 부담감의 큰 덩어리로 가슴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 무더운 여정을 찾아간 지역을 중심으로 풀어놓고자 한다.
대안탑
서안은 이제 당나라 때의 옛 영화를 되찾는가? 적어도 저녁에 나가 본 서안의 중심가는 세계제국 당의 영화가 다시 온 듯 싶었다. 휘황한 조명을 받고 서있는 종루. 새로 건설된 화려한 백화점들과 더위를 피해 거리로 나온 광장의 엄청난 사람들, 그 틈에 여기 저기 드물지 않게 보이는 머리 노란 서양 사람들 등을 보면서 나는 신라의 많은 학자들과 승려들이 유학을 위해 찾았던 국제도시 장안을 떠올렸다. 그 장안에는 세계 각처에서 찾아온 유학승들이 가득 했을 것이다. 그 틈에 자장, 원광, 원측, 의상 등 신라의 유학승들도 끼어 있었다. 그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인 7세기 중엽에는 서안에는 대안탑(大雁塔)이 세워지고 또 얼마 있다가 소안탑(小雁塔)이 세워지는 대 역사가 있었다.
한국 전탑과 관련하여 우리가 서안을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당대(唐代) 전탑이 한국 전탑과 유사성을 보이는 것 외에도 많은 신라의 승려들이 당대 전 시기에 걸쳐 장안 즉 이곳 서안에서 유학을 하였고 그들이 다시 귀국하여 한국 불교에 새로운 기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대안탑이 당대의 전탑을 대표하는데는 이의가 없다.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서 세웠다고 하는 대안탑이 처음 지어진 것은 652년이며 측천무후의 후원으로 현재의 누각식 대안탑이 된 것은 장안년간(701~704)이다. 처음 만들어졌던 대안탑은 토심 전탑으로 내부를 흙으로 채운 벽돌탑이었다. 대안탑이 처음 지어지고 다시 고쳐지던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은 이 탑 외에도 소안탑, 선도탑, 현장탑, 원측탑 등 많은 탑들이 만들어지던 시기이며 그와 함께 현장의 귀국으로 중국의 불교가 새로운 체제로 전환되는, 말하자면 개혁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 때는 이미 신라의 유학승 원측이 현장과 함께 역경사업을 활발히 하던 시기이며 또 의상이 661년 당에 건너가 700년경 귀국하기 까지의 시기이니 불교계의 새로운 기운과 활발히 조성되던 대규모의 전탑들은 유학승들에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안겨줬을 것이다.
대안탑이란 이름은 탑이 완성되었을 때 큰 기러기 떼가 탑에 날아와 앉았다는 전설에서 붙은 것이라 한다. 탑의 일층에는 탑으로 들어가는 문이 사방으로 나 있고 남쪽을 향한 문 양쪽에는 당대의 명필 저수량이 쓴 성교서의 비가 서 있는데 한낮의 햇볕을 정면으로 받은 비석의 글씨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탑 안에 설치된 사다리를 밟아 높이 64미터의 탑 위에 올라서면 탑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으로 뻗은 넓은 대로가 전 세계를 향해 내달리는 듯 하다.
대안탑이 누각식 전탑을 대표한다면 소안탑은 밀첨식(密 式) 전탑을 대표한다 할 수 있다. 누각식이 첫 층부터 마지막 층까지 일정한 비율로 줄어들어 가는데 비해 밀첨식은 첫층의 높이가 특별히 높고 둘째 층부터는 옥신의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어 옥개석이 낮게 중첩되어 층수가 많다. 또 위로 갈수록 옥개석의 폭이 좁아져서 측면의 선을 보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우아한 실루엣을 보여준다. 대안탑이 남성적이라 하면 소안탑은 여성적이라 할 수 있고 그래서인지 돌로 된 탑문의 위를 보면 공양인물이나 여러 가지 초화무늬들과 다양한 문양들이 당나라 초기의 화려한 예술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탑은 707년에 세워진 것으로 대안탑이 크게 새로 지어진 후 5,6년 후에 세워졌으니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소안탑이라고 하지만 대안탑에 비해서 작다는 것이지 높이가 40미터가 넘는 대탑이다. 탑이 세워지던 당시에는 장안성 남쪽에서 성을 바라보면 양쪽으로 두 탑이 우뚝 선 모습이 가히 장안의 상징으로서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대안탑과 소안탑을 오르내리는 동안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로 우리는 거의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대안탑은 말이 7층탑이지 현대식 건물로 20층이 넘고 소안탑도 15층은 되는 높이인데 허리도 제대로 못펴는 좁은 사다리를 통해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들고 오르내렸으니 온몸이 땀에 젖고 옷은 온통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선도탑
서안 남쪽에 있는 신화원(神禾原) 언덕의 서쪽 끝에 있는 향적사(香積寺)의 선도탑(善導塔)은 밀첨식 전탑으로 전체적인 모습은 소안탑과 흡사했다. 탑의 주인인 선도는 중국 불교 정토종의 제 2대 조사이다. 그가 681년에 입적하자 제자 환운화상( 和尙)이 선도대사를 위해 향적사를 짓고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탑을 보면서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 탑이 주위보다는 좀 높은 언덕위에 있으며 강이 합류되는 지점을 내려다 보는 곳에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서쪽의 두 강이 합류되는 점은 찾아보지 못했으나 남쪽의 호하(好河)라고 불리는 하천에 내려가서 탑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법흥사 탑과 임하사 탑 등 신라의 전탑들이 대체로 강가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것과 매우 닮은 꼴을 하고 있어서 나는 이 탑에 특별히 깊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탑은 상륜부가 파손되어 있어 나무계단을 통해서 상당한 높이까지 올라갈 수는 있었으나 탑의 창을 통해서 멀리 강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향적사에서 흥교사로 향하는 중에 장안현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볶음국수라고 할 수 있는 차오미엔은 엄청난 양으로 기를 죽이는 것을 빼면 맛은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국수를 먹고 밖으로 나오니 맞은 편 산위에 탑이 둘 보였다. 다른 일행이 아직 국수를 먹고 있는 틈을 타서 탑 근처로 발을 옮겼다. 화엄사탑이라는 안내문이 붙은 탑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에 서 있었다. 하나는 당대의 방형 누각식 7층탑이고 다른 하나는 평면 6각형의 5층탑이었다. 탑은 최근에 주변을 정비한 흔적이 있었으나 무너진 담 너머로 사람이 지나다녀도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식으로 관리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언덕 위에서 탑을 내려다 보는 것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바로 밑의 마을을 건너 눈을 멀리 가져가면 끝없는 푸른 들이 하늘과 맞 닿아 있었다.
원측의 탑
서안에 온 한국사람이라면 한번쯤 관심을 가지는 절이 흥교사(興敎寺)다. 이곳은 현장법사의 문하에서 규기(規基)와 함께 중국 불교의 한 축을 형성한 신라의 유학승 원측(圓測)의 묘탑이 있기 때문이다. 흥교사는 장안현에서 동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소릉원(少陵原)이라는 산 중턱에 있었다. 절의 입구에는 한국에서 기증했다는 동종이 높은 종각 위에 매달려 있었다. 남쪽으로는 광활한 중원의 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계해년 겨울 강유위(康有爲)가 썼다는 흥교사의 현판은 법당의 오른쪽 측면 벽에 걸려 있었는데 좀 뻣뻣한 느낌을 주는 글씨가 묘한 매력이 있었다.
탑은 법당의 서쪽으로 현장탑을 중심으로 동쪽에 원측, 서쪽에 규기의 탑이 있다. 원측의 탑은 측사탑(測師塔) 규기의 탑은 기사탑(基師塔)이라고 2층탑신 중앙에 새겨져 있다. 현장탑은 전체 21미터로 5층인데 1층 남쪽을 향하여 감실문이 나있으며 문 위로 당삼장탑(唐三藏塔)이라고 탑명을 새겨 넣었다. 감실 안에는 붉은 가사를 걸친 현장법사가 선정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 탑은 669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지금의 모습으로 된 것은 828년의 중수 때라고 한다.
측사탑과 기사탑은 현장탑의 좌우에서 높이 5미터의 3층탑으로 스승을 모시듯이 서 있는데 현장탑보다 약간 앞으로 나와서 감실문이 현장탑을 향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스승을 향하여 시립한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는 없이 벽돌을 삼단으로 계단식 탑신 받침을 만들어 그 위에 탑신을 올리고 있는데 이는 동부동 5층전탑과 매우 유사하게 느껴졌다. 이들 세 탑 역시 아래로 넓은 들을 내려다 보고 서있으나 지금은 남쪽으로 높은 담을 쌓아 시야를 막아 놓았다. 탑의 동쪽으로는 장미꽃밭이 잘 가꾸어져서 진한 꽃 향기가 탑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경주 모량 출신인 원측은 왕족으로서 3세때 불가에 들어섰고 15세에 당으로 건너 왔다. 그는 유식학 연구에 몰입해 일가를 이루었다. 당태종의 후원으로 많은 불경을 번역했고 서명사를 중심으로 서명학파를 형성했다. 현장의 문하에서 규기와 함께 경전 번역과 연구에 힘썼으나 법상종 계통의 현장 일파는 유식에 힘쓰는 원측을 이단시하기도 했다. 그는 신라의 유학승으로 중국에 뿌리를 둔 승려들에게서 왕따를 당하다시피하며 고군분투를 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의 탑 옆에 규기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원측의 탑을 볼 때 원측이 당시 불교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무게를 알 수 있다.
남쪽으로 들판을 건너서 향적사에서 안개로 볼 수 없었던 종남산(終南山)이 뿌연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의상이 입당하여 중국 화엄을 일으킨 지엄(智儼)을 찾아 8년간 화엄을 전수 받았다는 그 산이다. 원측이 유식의 권위자로서 이미 중국 불교에서 상당한 자리를 굳히고 있던 시기 당에 들어온 의상이 왜 새로운 불교로 자리잡던 화엄을 선택했을까? 그것은 당 유학승의 대선배로서 원측이 추천해주지 않았을까? 없는 기록으로, 또한 불교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나에게 그러한 물음의 답은 나와 종남산 사이에 가려진 안개만큼이나 뿌옇게 가려진채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탑박물관 소림사
7월 12일, 도착한 날을 빼면 만 이틀 간의 서안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정주(鄭州)로 갔다. 정주의 날씨는 서안보다는 좀 나은 듯 했지만 그것은 서안보다 길거리에 사람이 좀 적어서 느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저녁식사를 위해 중심가로 나서서 처음 눈에 띈 것은 2.7 기념탑이라는 높은 건축물이었다. 네온으로 장식된 이 건축물은 과거에는 정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정주는 1923년 2월 4일 정주에서는 중국 최초로 노동자 파업이 일어난 곳이다. 2월 7일 당시 군벌 오패부(吳佩孚)의 진압으로 30여명이 죽음으로써 파업은 실패로 끝났다고 하는데 진압당한 2월 7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 이 14층짜리 쌍탑이다.
처음 이 기념탑 앞은 넓은 광장으로 조성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복잡한 네거리로 변해버렸고 탑은 네온으로 울긋불긋하게 장식은 되어 있었지만 인근의 백화점 건물에 묻혀 그리 크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바친 사회주의 투쟁의 현장은 이제 서서히 밀려드는 자본의 물결에 어쩔 수 없이 묻혀가고 있었다.
우리가 정주를 찾은 것은 하남성(河南省)의 등봉현(登封縣) 숭산(嵩山) 일대의 사찰을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등봉현에는 숭산이 있고 숭산에는 소림사(少林寺)가 있어 우리에게는 매우 친숙한 곳이기도 하다. 소림사 외에도 이 산 기슭에는 숭악사(嵩岳寺) 법왕사(法王寺) 회선사(會善寺) 영태사(永泰寺) 등이 있고 그 절들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랜 탑들이 우뚝 우뚝 솟아 있어 숭산을 빛내주고 있기도 하다.
5년 전인가 소림사를 찾았을 때보다 주변은 많이 정리되어 있었다. 소림사 바로 앞에까지 난립되어 있던 무술학교들도 절 밑으로 모두 내려갔고, 입구에서 영빈승(迎賓僧)의 동상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절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소림사 탑림(塔林)으로 향했다. 탑림은 소림사보다 약간 위쪽으로 있는 소림사 승려들의 묘탑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여기에는 너무 많은 탑이 있어 소림사 승려들도 탑이 모두 몇기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황제가 이 곳을 방문하여 소림사 방장에게 탑의 수를 물었는데 방장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다. 그러자 황제는 병사 300명을 동원하여 한 사람이 탑 하나씩 맡아서 서있도록 하여 탑의 숫자를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300명을 다 동원했는데도 남는 탑이 있었다. 나중에 그 까닭을 알아보니 탑이 너무 커서 한 탑에 병사 두 사람 이상이 서있는 곳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 곳에 탑이 많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지만 이렇게 많은 탑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장관은 다른 곳에서는 맛보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모두 245기의 탑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탑의 모든 종류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탑 박물관과 같다.
영태사-숭악사탑, 법왕사탑
소림사의 입구에 영태사라는 큰 절이 있다. 이 절은 북위 효문제의 여동생 영태공주를 기념하기 위한 사찰인데 절 뒷산 중턱에 12층의 밀첨식 방형 전탑이 우뚝 솟아 등봉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탑의 내부는 1층부터 12층까지가 모두 터져 있어서 아래에서 위를 보면 내부의 벽돌 쌓은 모습이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숭산에서 가장 일품의 탑을 든다면 역시 숭악사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탑은 현존하는 중국의 고탑 중 가장 이른 연대인 후위 효명제 정광원년인 서기 520년 건립으로 알려져 있는데 목탑에서 전탑으로 바뀐 가장 빠른 유적이기도 하다. 탑은 평면이 12각형으로 되어 있어 거의 원형에 가까우며 전체 15층 39.8미터에 이르는 대탑이다. 기단부는 이중으로 나뉘어 있는데 사면으로 문이 있어 사방으로 통한다. 아래층은 소박하게 아무런 장식도 없는데 반해 위층은 목조건축의 아기자기한 맛을 살려 정교한 건축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내부는 밑에서 제일 윗층까지 트여 있다. 탑의 수리 당시에 상륜부에서 천궁(天宮)이라고 하는 유물 수장시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한국의 칠곡 송림사 전탑의 상륜부 아래에서 역시 같은 시설이 발견되고 유물이 조사된 바 있어 앞으로 좀 더 비교 검토할 필요성을 느꼈다.
숭산의 또 하나의 장관은 법왕사탑이다. 법왕사는 숭산의 많은 사찰 가운데서도 가장 빨리 세워진 절로 알려져 있는데 동한 명제 때인 서기 71년에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법왕사는 숭악사와는 능선 하나를 경계로 양쪽 계곡에 동과 서로 갈라져 위치한다. 두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서 보면 두 절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높이가 40미터씩 되는 거대한 탑이 능선 위로 우뚝 솟은 모습은 어떻게 말로 형용키 어렵다. 법왕사는 최근 새로 규모를 갖춰 지은 절로 관광을 목적으로 해서 건축한 것으로 보였다.
탑은 절 뒤의 산 중턱에 있는데 형태는 평면 방형의 15층 밀첨식으로 첫째 층에는 불상이 두 구 모셔져 있었다. 탑 부근에는 당대의 승려탑들이 여러 기 있는데 모두 단층의 부도탑으로 옥개석 위는 사각추 형태로 되었고 상륜에는 연화문을 비롯한 화려한 조각들이 무너져가는 탑들을 안쓰럽게 장엄하고 있었다.
법왕사탑과 주변의 묘탑들은 모두 벽돌이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이 심하고 불상을 모신 감실에는 더러운 오물이 가득했다. 아래의 엄청난 돈을 들여 새로 지어진 화려한 지붕의 사찰 건물을 굽어보며 탑 속의 부처는 무슨 생각을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새로운 사찰 신축복원은 종교적 목적도 아니고 문화재의 복원이라는 차원도 아닌 그야말로 돈을 벌기 위한 관광수입이 목적이다. 새로 지은 절을 구경하기 위해서 입장료를 한국돈으로 약 3000원이나 주어야 하는데 절 뒤의 법왕사탑 속의 부처는 오늘도 인근 농민들이 급할 때 마다 들어와 실례한 오물 속에서 파리 떼에 시달리고 있었다.
혜산
전탑 찾기의 마지막 순서로 정한 곳은 장백현(長白縣)의 영광탑(靈光塔)이다. 장백현은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여행사의 운전기사는 처음 5,6시간 쯤 걸린다고 했다가 7시간은 걸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또 영광탑도 자기가 가 봤으니 걱정 말라고도 했다. 백두산을 서쪽으로 돌면서 경비병으로부터 엄중한 짐 검색도 당했다.
며칠전에 북한사람들 170여명이 한꺼번에 도강을 했다고 했다. 숭산 영태사에서 문화재 촬영허가 문제로 약간의 시비가 있었을 뿐 지금까지 별 문제 없이 촬영을 해왔기 때문에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일행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한국사람들의 발해 유적이나 고구려 유적의 촬영 및 취재는 아예 금지하고 있는 형편에 검문검색이 이렇게 심하니 앞으로 어떤 어려움을 당할지 예측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백두산의 서쪽 기슭을 돌아 압록강변에 다다르니 북한의 산천이 손에 잡힐 듯 펼쳐졌다. 압록강은 너무 좁아 강물은 아이들의 미역감기에도 충분치 않을 것 같았다. 강 건너에는 북한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이 여느 중국의 변방도시와도 같이 평화롭게 보였다. 강 건너 북한의 도시는 혜산시였다. 내가 혜산의 풍경을 처음 본 것은 몇 년 전인가 북한의 식량난이 국제적으로 크게 부각이 된 후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였다. 그 때 기자는 바로 이 장백현에서 혜산시의 뒷산 공동묘지를 망원렌즈로 담아 해설을 붙이고 있었다. 오늘도 장례의 행진이 계속되고 있다. 모두 굶어죽은 사람들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렇게 중계방송 하듯이 해대야 하는 것인지 답답한 심경으로 화면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그 혜산이 눈앞에 있었다.
몇 명의 아이들이 강에서 고기를 몰고 있을 뿐 저녁 무렵 혜산은 너무 조용했다.
비포장 도로에 흔들리느라 우리 모두는 기진맥진한 채 영광탑에 도착했다. 아침 7시에 떠나서 오후 5시가 넘었으니 10시간 이상 걸린 셈이다. 구름이 끼었으나 아직 어둡지 않아 촬영을 하기로 했다. 영광탑은 혜산을 내려다보는 산 위에 서 있었다. 영광탑과 혜산시 사이에는 좁고 긴 압록강이 아주 천천히 흘러갔다. 영광탑이 세워지던 8세기에서 10세기초에 걸치는 발해시기에는 강은 국경이 아니었다. 지금은 다리가 있어도 건널 수 없지만 그때는 다리가 없어도 건너는데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영광탑에 도착한 일행은 탑보다는 혜산에 더 오래 눈을 두고 있었다.
총 높이 13미터의 5층전탑인 영광탑은 서안 흥교사에서 보았던 현장탑과 매우 유사했다. 기단부는 아주 얕게 또 탑신보다 약간 더 넓은 폭으로 돌을 2단으로 쌓아 만들었는데 본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첫 층의 남쪽으로 강을 향해서 아치형 문을 냈고 둘째 층부터는 사방으로 살창을 달았다. 내가 한국 전탑과 관련해서 이 탑을 주목한 것은 탑 지하에 사리함을 수장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조사결과 밝혀진 때문이다.
중국의 탑은 대체로 사리수납시설을 탑신에 두는 것이 아니라 지하에 두고 있다. 이를 지궁(地宮)이라 하는데 안동 임하사지 전탑지 조사에서도 지하에서 사리함을 안치한 심초석이 발견된 바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영광탑은 그 규모나 형태면에서 한국 전탑과 매우 유사할뿐더러 지하의 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