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가산 마을, 천주동 이야기(글/윤천근).jpg)
가을 산 속으로
산은 언제나 거기 그러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으므로 불변함의 상징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세상에 진실로 불변함이 어찌 있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인간의 세상 속에서 진실로 불변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네가 이미 만들어 갖고 있는 인식, 편견 같은 것 속에만 있을 뿐이리라. 우리네 인식 속에서 산은 불변함의 증거와도 같이 말하여지지만, 기실 산은 이 세상의 어느 무엇보다 잘 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산은 그 변함과 불변함 양 극단의 특징을 한 자리에서 아우르고 있는 모순의 실체이다. 모순은 서로 배타하는 것이므로 여간해서는 한 자리에 묶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니, 아주 잘 변함과 좀처럼 변하지 않음도 그렇게 한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적수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똑바르게 한 줄로 그어질 수 있는 관계 속에서만 그러하고, 줄긋기가 조금 어긋나기라도 하면 모순도 한자리에 얼마든지 동지로 어울릴 수 있게 된다. 우리네 인생 속에서 우리는 매양 조금씩 어긋나는 줄긋기를 하며 살아가니, 산을 중간에 놓고도 우리가 그런 서툰 줄긋기를 하는 것이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고, 그러므로 우리가 산은 불변한다고 말하는 입으로 또한 산은 아주 잘 변한다고 말한다고 하여 삿대질을 하며 틀렸다고 시비할 이유는 없으리라.
산을 중간에 놓고 우리가 그것이 아주 안 변한다는 생각과 그것은 아주 잘 변한다는 생각 사이를 한 줄로 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시간의 마법 때문이다. 긴 시간을 가져다 놓고 보면 산은 언제나 그 모습이고, 짧은 시간을 가져다 놓고 보면 산은 도회의 처녀들처럼 때마다 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기 위해서는 큰 도시, 번화한 거리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오 가는 처녀아이들을 바라보는 것과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것이 길어 올리는 빛깔들의 차이를 지켜보는 것 중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나는 이 밖의 어떤 방법을 가져다 놓아도 이 둘 만큼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는 점을 확신한다.
두 달 전에 왔던 학가산의 남쪽 경사면을 타고 깊은 계곡 속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나는 처음 오는 것처럼 신선한 느낌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색깔들이 학가산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있었다. 세월은 10월의 중순으로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가을이 지천으로 내려와 눈길 닿는 곳 어디에나 펼쳐져 있는 학가산이었다. 한반도의 모든 곳에서 그러하듯, 학가산 깊은 골짜기 속에서도 가을은 무엇보다도 싯누런 색깔로 벼논들 위에 내려와 있었다. 학가산 남쪽의 깊은 골짜기. 실개울이 펼쳐낸 좁은 계곡은 완만한 경사면을 그리면서 끝없이 위를 향해 솟아오르고, 그 사이에 인간의 피 땀으로 개척된 다락논에는 투명한 형광색으로 빛나는 노랗고, 누렇고, 노오란 색깔들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태양빛이 그 위에 쏟아진다면 우리는 차마 차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흐린! 하늘 아래서도 그렇게 우리의 온 시선을 붙잡아매며, 가을의 벼논들은 층층으로 포개져 그 위에 학가산을 떠받들고 있었고, 학가산은 아직 여름의 푸른 색감으로 남아 벼논의 가을색을 곁눈질하며 그 발끝으로 조금씩 가을을 길어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벼논들 사이에는 학가산의 농부가 학가산의 높이를 다락논 아래 담아내기 위해 힘들게 다듬어 놓은 논두렁들이 황룡의 몸짓으로 꿈틀거리며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몸살 날 듯이 짙은 가을의 색감, 다락논의 미학을 학가산은 하늘의 높이에서 내려다보며 서서 언제나 그러한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다. 변화는 학가산의 일상이고, 변화 앞에서 들뜨고 놀라워하는 것은 인간일 따름이기 때문일까?
억지로 들뜬 마음을 눌러 앉히고, 학가산 남쪽 품속으로 침략하는 길을 계속 타고 올라가니, 두 달 전에 왔던 광흥사 가는 길이 옆으로 열린다. 그 길 멀리 광흥사의 은행나무가 보이고, 그 너머로 광흥사의 대웅전 지붕이 보인다. 은행나무는 아직 머리가 푸르르고, 대웅전의 지붕은 멀리에서도 너무 크고 높음을 느끼게 한다.
천주동 가는 길
광흥사 가는 샛길을 옆으로 뻗혀놓고 길은 계속하여 조금씩 솟구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조금 더 전진하니 길 가에 창풍 마을이 버티고 섰다. 거기 작은 팻말 하나가 나의 시선을 온통 잡아끈다. 버스 종점. 버스는 더 이상 학가산의 품을 침범할 힘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아니면, 더 이상 상승의 의욕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여야 옳을까? 인간의 행동방식은 주로 경제가치가 결정을 한다. 주로라고 하는 것은 이 덕목이 집단의 행동방식을 장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밖에는 개인의 행동양식이 놓여지게 마련이다. 창풍마을은 인간의 집단적 행동양식이 자리하고 있는 영역의 한계치를 보여준다. 그 이상 산 위로 걸어 올라가는 것은 인간적이지도 않고 경제적이지도 못하다. 그것은 개인적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 때만이 높은 산 속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창풍을 넘어서서, 길은 아스팔트로, 시멘트로 발라져, 1차선 폭을 지니며 오르고, 내리고, 또 오른다. 길이 돌아들며 오를 때마다, 양쪽 산기슭으로 차단된 사이의 좁직한 액자형 풍경 속에는 어김없이 학가산 정상이 얼굴을 내민다. 철제구조물을 머리에 인 학가산을 향하여 길은 계곡의 한 켠을 타고 계속하여 나아가고, 길의 한 켠에는 줄 선 전봇대와 그 위에 늘어진 전선줄이 언제까지나 동행할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잘 포장된 길이 끝나고, 옛날 시멘트 포장길이 나타난다. 오래된 길은 패여 나간 곳도 있고, 비포장 상태인 곳도 있다. 자동차는 이제 털털거리며 신음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한다. 이 오래된 길은 80년대에 큰 수해가 났을 때 북의 김일성 수령이 보내 준 시멘트로 포장한 것이라고 한다. 천주동 오르는 좁고, 가파르고, 후미진 길 위에서 현대사의 한 장, 그것도 마음 훈훈한 한 장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뒤에 깔려 있는 정치적 이해관계야 굳이 잡아내어 앞세울 필요가 있는 것이겠는가?
이제 산골짝 다락논들 중에는 벼 대신 잡초만을 잔뜩 키우고 있는 것도 많이 눈에 보인다. 그 위 천주동의 세상이 옛날 같지 않음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가파른 산의 계곡 속에 손바닥만한 다락논을 힘들여 만들던 시절과 잘 만들어져 있는 다락논을 부쳐 먹지도 않고 방치해 두고 있는 시절은 각각 천주동의 빛과 그림자를 대변하여 준다.
마침내 길은 급하게 휘돌며 올라붙고, 그 위에서 완만한 경사면을 가진 평지를 만난다. 한 켠으로 참조가 익어가는 밭이 펼쳐지고, 그 위에 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학가산 남쪽 기슭 첫 번째 마을, 천주동이 바로 그곳이다.
천주동 풍경1-손씨 할머니 이야기
마을 영역의 길은 시멘트로 새로 바른 느낌이었다. 시멘트 길은 마을 속으로 들어가면서 세 갈래로 나뉜다. 세 갈래 길은 은둔한 사람을 상징하는 길이니, 학가산 속으로 걸어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아주 잘 어울리는 선택이라고 하겠다. 하나의 길은 마을을 휘돌아서 마을 뒤에서 서쪽으로 나아가고, 또 하나의 길은 옆으로 서행하며 마을 중간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르고, 다른 하나의 길은 마을 아래쪽의 집으로 내려간다. 그 세 갈래 길이 시작되는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소나무들이 비틀린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다. 오래 된 만큼 키가 크지는 않은 모습이다.
세 갈래 길은 그 소나무들의 뿌리 밑에서 시작되어 서쪽을 향해 뻗어나가고, 동쪽으로는 포장되지 않은 한 가닥의 아주 좁은 길이 뻗어 내려가 전답들 사이를 지나 저쪽 산의 중턱 쯤을 넘어가는 모양이다. 마을 입구 소나무 영역 주변의 동쪽으로는 묘지들이 여러 개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 입구 한쪽을 점령하고 있는 묘지들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느낌이 아주 새롭다. 묘지들은 멀리 안동 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인간의 영역을 멀리 떠나 산 속에 들어와 살다 죽었으므로, 영혼이나마 인간의 영역이 가장 잘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모시고자 하였던 것일까? 모를 일이다.
중간 길을 택하여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 첫 번 째 집, 한쪽은 대문으로 비워두고, 무릎에도 차지 않는 낮은 돌담이 쳐져 있는 안마당 한쪽에는 돌담에 기대어서 거름탕이 마련되어 있다. 깨쪼자리를 잘게 잘라 모아놓은 거름더미는 아직 썩지 않은 탓인지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 발치, 대문 한켠으로 토란 줄기가 여럿 쭉쭉 올라와 시퍼런 잎을 달고 방문자의 눈을 희롱한다.
집의 안마당은 시멘트로 말끔히 발라져 있고, 시멘트 속에서 여기저기 커다란 자연석의 바위들이 튀어나와 매끈한 얼굴을 자랑한다. 원래 바위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곳에 시멘트를 바른 모양이다. 그 마을에 머무는 동안 내내 확인한 일이지만, 바위는 이 마을의 주민이라 하여도 그릇되었다고 말할 사람들이 없을 정도이다. 여기 저기 커다란 바위들이 버티고 서 있다. 바위 밭 한가운데 인간의 삶터가 개척된 것이니, 바위야말로 원래 이 곳의 주인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 되는 것이리라.
집은 작고 아담하며 앞 쪽으로 샤시문이 달려 있다. 샤시문 사이, 두 개의 나무 기둥에는 옛 물건들이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한 쪽 기둥에는 밀짚모자가, 다른 쪽 기둥에는 조랭이가 보인다. 둘 다 세월을 얼마나 희롱하였는지 잿빛을 넘어 검은 빛이 우러날 정도로 낡은 것이다.
기둥에 걸린 20년도 더 된 복조리“집 새로 지은지도 십 수년 되었는데, 저 복조리는 그 전, 어른들 살아계시던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니, 이십년도천주동살이 60여년의 손씨할머니 더 된 물건이지요.”
집 주인 할머니의 말씀이시다.
할머니는 손씨, 친정이 서후 게실이라 한다.
“옛날에 여기 집이 있는 줄 어찌 알았겠어요. 거긴 여기 비하면 대도시지요.”
그러니 대도시에서 학가산마을 천주동 산골로 유배오듯 시집을 오신 셈이다. 쉬운 선택을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왜정 때 처자공출 얼마나 했습니까? 그래 일찍 시집을 왔어요.”
그 때 나이 16. 꽃 다운 청춘이었다.
시멘트로 각을 잡은 뜨락 한쪽에 앉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햇빛이 쨍하고 빛났다. 햇살 아래에서 천주동의 작은 집 안마당에는 동화 속 같은 평화가 자리 잡고, 오후의 시간은 빛살 속에 증발되어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는 듯한 느낌이다.
“경운기 타고 가다가 넘어박혀 겨우 살아났어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다친 팔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저 너머 논 일곱 마지기는 어른들 때부터 버려두었고 거기 밭을 부쳤는데 경운기로 가다가 처박아 버려서 아들이 저 너머는 넘어가지도 말라고 해요.”
저 너머는 동쪽인 모양인데, 길이 아주 험하다는 것이다. 경운기 운전 실수가 아니라 실수를 할 수 밖에 없도록 좋지 않은 길이니 넘어가지도 말라는 이야기일 것이리라.
“병원 한 달 있다 나왔는데 아직 거동도 불편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해요.”
그만하기가 천만다행일 것이었다.없는 살림에 병원비가 70만원씩이나 들었다니 그것은 고스란히 외지 나가 사는 아들의 몫이었을 터이다. 수수 농사 지은 것이 반은 비들기가 자기 식량 삼아 버리고 겨우 27만을 벌었다고 한다. 수수값 27만원과 병원비 70만원 사이는 우리네 농촌과 도시인들사이의 삶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할머니의 연세는 71세, 해주오씨 영감님의 연세는 그보다 2살 많다고 한다. 영감님 병원 간 이야기는 없으니, 다행히 영감님은 경운기와 함께 가파른 길 한켠에 쑤셔 박히고도 크게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다. 손씨 할머니와 오씨 할아버지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고 한다. 집에 남아있는 자식은 하나도 없다. 막내는 아직 결혼 전이다.
“이 동네는 마구 애들이 공무원입니다. 저 위의 집에선 판사도 나왔잖아요.”
젊은이들이 외지에 나가 다들 잘 자리잡고 산다는 이야기인데, 그만큼 이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떠난다는 말이 되기도 할 것이다.
마을은 경사면 위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집들마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앉은 이 집의 뜨락에서는 눈 앞으로 얼마쯤 떨어져 까치집을 이고 있는 미루나무가 바람에 온 몸을 떨고 있고, 그 너머로 한쪽으로는 건너산 산기슭이, 다른 한쪽으로는 안동시가 멀리 눈 아래 쪽으로 바라다 보였다. 그만큼 산도 들도 나무도 시야를 막고 서지 않는 것이다.
이 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우물간이다. 안채와 바깥채가 기역자로 꺾이는 사이에 좁직한 사각형의 공간이 남고, 그곳에 우물간을 만든 것이다. 우물간에는 마을 공동 샘으로부터 내려온 물이 수도꼭지를 통하여 똑 똑 떨어지는 곳에 직사각형의 확을 두 개 나란히 파놓은 시멘트 바닥이 보였다. 뒤쪽에는 자연석 바위가 낮게 울타리 역할을 하고, 앞 쪽은 좀 처마를 높여 허리를 굽히고 들어설 수 있을 정도는 만들어 놓았는데, 지붕은 슬레트로 처리되어 뒤쪽이 급하게 낮아지는 사선을 이루고 있었다. 지하 2백미터의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것이라 하였다. 마을이 해발 높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으니, 지하 2백미터라고 하여 보았자 해발 3-4백 미터는 될 것이었다.
천주동 풍경2-오씨 할아버지 이야기
마을 안 여기저기에 버티고 있는 커다란 바위 만큼이나 많이 눈 안에 들어오는 것은 감나무였다. 감나무는 멀쑥하게 큰 키를 하고 주홍의 과일을 꽃처럼 매달고 있었다.
손씨할머니의 삶이 묻어있는 우물간손씨 할머니 집으로 향하는 길은 마을 안 여기 저기로 통하는 중심로였다. 손씨 할머니 집 동쪽에서 그 길은 또 세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마을 안 이곳 저곳에는 오래 비어 있어서 퇴락한 집들이 발견되었다. 천주동이라 하여 우리나라 농촌마을의 일반적 풍경으로부터 어찌 비켜갈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오히려 천주동 같은 산 속 깊은 마을일수록 공동화는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진행 될 수 밖에 없는 노릇일 것이다.
다시 마을 입구로 나와 보니 외지 번호판을 단 자동차에 젊은 남자가 무엇인가를 넣고 있었다. 집에 다니러 와서 가을걷이 한 것을 나누어 가려는 모양이었다.
“전에는 한 20호가 넘었는데, 지금은 여덟, 아홉 집만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남자의 말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세 갈래 길의 아래쪽에 있는 집을 찾아들어가 보았다. 노인 부부가 살고 있고, 아들 딸이 다니러 온 모양이었다. 집은 작은 건물 두 채가 조금 떨어져서 직각으로 만나는 구조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좁직한 안마당이 자리를 잡았다. 바깥쪽 집의 뜨락에서 노인 부부는 감을 정리하고 있었다. 장대로 두들겨 딴 것인지, 감은 여기저기 상채기를 보여주었다.
노인의 연세는 76세. 해주 오씨로, 성함은 복석이라 하였다. 형님 재석씨가 이 마을의 큰 어른이었으나, 이제는 안 계시고, 복석씨가 현재는 이 마을 최고의 어른이라 하였다.
천주동 마을은 해주 오씨 집성촌이다.
“고조께서 이 마을에 입향하셨어요.”
천주마을의 존로 오복석씨복석씨의 고조는 휘가 윤영이다. 해주오씨 벽성공파로, 시조인 고려 검교 군기감 감이었던 인유로부터 24세이다. 단기 4137년에 생하여 4199년에 졸 하였으며, 부친은 언성이다. 윤영은 남후 상아동에서 살다가 천주동으로 들어왔다. 평지에 살다 산꼭대기로 옮겨 살게 된 이유는 분명히 상당한 이야기거리를 담고 있을 터이지만, 노인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말을 아꼈다.
입향조이신 윤영의 부친 언성에게는 유성이라는 형님이 계셨으나 무후하였으므로, 조상 모시는 일은 그대로 윤영이 떠맡아야 하였다. 윤영은 9대 봉사하던 큰 집을 이어 천주동에서 해주 오씨 일파의 대를 이어가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였던 것이다. 윤영은 무후 하였으므로 아우 복영의 아들 부모가 대를 이었고, 부모는 수환 제환 두 아들을 두었다. 수환은 무후하였고, 제환은 세연, 세현, 세준 등 세 아들을두었다. 제환의 큰아들 세연은 용석 성진 두 아들을 낳았고, 둘째 아들 세현은 무후한 수환의 대를 이었다. 세현의 대에 와서 비로서 천주동 해주오씨 일문의 종가는 3남3녀의 다복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
세현의 장자 재석씨는 택문, 택영과 4녀를 두었고, 우리의 취재대상인 둘째 복석씨는 택형, 택봉 두 아들과 4녀를 두었으며, 셋째 상석씨는 승택, 택익 두 아들과 3녀를 두었다. 그러니 천주동의 역사는 아무리 이르게 잡더라도 윤영이 태어나던 1804년을 넘지 못하고, 윤영씨가 20 이상은 된 후에야 분가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1820년도 이후의 일이라 할 수 있을 터이며, 천주동에 집들이 늘어나는 것은 세현씨의 시대 이후, 그러니까 1900년대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천주동의 을씨년스런 하늘
세 번째 포장 길, 그러니까 마을 위쪽을 돌아 서쪽으로 나아가는 길을 따라가면 천주동에서 가장 넓은 들이 나온다. 학가산 봉우리가 오뚝하게 솟았다 내려앉으며 처음으로 조금 넓은 지형을 만들어 내는 지점에 천주동이 있다면, 천주동은 그 넓은 지형의 동쪽 급한 경사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고, 그 서쪽 넓은 들은 이 세 번째 포장도로를 통하여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마을 영역을 벗어나면 비포장길이 나오고, 그것은 마을을 위에서 큰 호를 그리며 감싸듯 나아가 서쪽의 들에 이른다. 들은 높은 산 속에 이런 평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넓다. 그 속에는 벼논도 있고 밭도 있다. 그 중 반절 쯤은 아직 경작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나머지 반절 쯤은 묵어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잡초더미 속에 과수나무들이 을씨년스런 모습을 하고 서 있는 것이 안쓰럽다. 여러 그루 대추나무는 아직 잎이 무성해야할 계절인데도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있고, 호두나무들 역시 나목이 되어 있다. 대추나무 중 하나는 예닐곱 개의 대추를 매달고 있어서 우리는 발돋움하여 그것을 알뜰히 따 먹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모과나무는 여럿 노란 과일을 매달고 있었으나, 벌레집이 되어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는 그 폐원 속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곳에 천주동의 오늘을 알려주는 증거가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잡초 늘어선 사이에서 무심한 새들은 표르릉거리며 날고, 손씨 할머니 안마당 뜨락에 잠시 내리쬐였던 태양은 우울하게 내려앉은 하늘 속 어딘가에 숨어버리고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려 하지 앉았다. 학가산이 그 정상에 모여든 지덕으로 길러낸 마을, 천주동의 오늘은 그렇게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 입구의 밭에 나와 혼자서 참조 수확을 하고 있는 오복석 할아버지를 다시 보았다. 할아버지의 아드님이 타고 갈 외지 번호판의 차는 여전히 세 갈래 길이 나누어지는 마을 입구의 소나무들 그늘 속에 주차되어 있었다. 오씨 할아버지 댁은 오늘 사람들의 훈기로 가득하지만, 저 외지 차가 그 훈기를 가득 담아 가 버리면, 저 오씨 할아버지네 댁조차 적막이 흐를 것이다.
깊은 산마을의 적막감이야 천주동을 지키고 있는 바위와 감나무 사이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것일 터이지만, 그 자연의 고적함과 다들 떠나가 버리고 공동화되는 인간의 적막감은 사뭇 성격이 다른 것일 수 밖에 없다. 전자는 정신을 투명하게 하는 적막감이지만 후자는 정신을 황폐하게 하는 적막감인 것이다. 김일성 수령이 내려 보낸 시멘트로 발랐다는 천주동의 비좁고 낡은 포장길이 천주동에서 내려오는 우리가 탄 자동차를 잡아끌어 계속하여 깊은 나락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천주동의 영화는 이미 과거의 일이라는 훈시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길가 말라가는 풀 숲에 몰래 핀 물매화의 작고 해맑은 꽃송이들만이 그런 우리의 기분을 조금 위안하여 줄 뿐이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