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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갇히고 싶다(글/강희동)

도회지에서 살다보면 때때로 훌훌 털고 조용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몸에 부대끼는 수 많은 사람들, 차 소리, 분주한 움직거림, 제 멋대로 현란한 빛……. 그것들로부터 슬그머니 헤어 나와 흔적 없이 잠적하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 생활반경이 복잡하게 헝클어져 갈등의 칼날이 예리해질 때면, 그 때 머리속에 그려지는 곳이 있다.

옛집의 아래채에 소외양간 옆쯤에나 달려있는 헛간. 거기에는 빛들이 잘 들어오지 못해 하루 대부분이 어두침침하다. 그러다 저녁 때 쯤에야 사선으로 비스듬히 석양이 잠깐 따고 들다가 이내 어둠속으로 묻혀 버리는 곳. 소 여물에 쓸 짚더미가 구석에 쌓여있고, 윗쪽 천장 구석쯤에는 달걀 둥우리가 메어 있다.

한 켠에는 써레, 훑체이, 바소쿠리, 지게, 종가래, 곰방메, 병아리 둥우리 등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는 농기구들이 자리하고 있다. 종일 시달린 밭이나 논에서 돌아와 가지런히 제자리에 자연스럽게 걸려 휴식을 취하는 삽과 괭이, 호미, 쇠갈고리 등을 볼 수 있다. 참 평화롭고 인정스러운 모습이다. 그러한 유년시절의 풍광들이 뇌리속에 숨어 있다가 간헐적으로 그곳에 머무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고 있다.

누구나 외로워 본 적이 있으리라. 특히 부모를 떠나 유년시절을 시골 할배 할매 슬하에서 생활한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만 섭섭하고 속상하면 소가지를 피우며 으슥한 곳에 쳐 박혀 삐지는 것이다. 그때 장소는 바로 누구도 자주 눈길이 가지 않는 헛간이나 잿간이였다.

그곳은 우선 짚더미가 있어서 좋았고, 밤이 으슥해도 옆 마구간의 소여물 씹는 소리가 있어 무섭지 않았다. 이따금씩 횃대 위의 닭의 골골거리는 소리도 들려 우선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헛간 짚더미에 드러누워 심통을 부리다, 저녁이 으슥해지면 식구들이 걱정스러이 "누구야 누구야" 분주히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더욱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기나 하는 것처럼 숨죽이고 대꾸도 않은 채 더욱 소갈머리를 드러낸다.

이윽고 어둠이 깊게 쌓이고 소의 여물 씹는 소리가 유난스럽게 빠드득거리며 맛있게 들린다. 배속에서는 꼬르륵거리며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그때 엉성하게 짝귀질로 짜 맞춘 투박한 판자 틈 사이로 반짝이는 별이 보인다. 아-, 이것은 스스로를 알아주는 존재의 발견이다. 검은 어둠속에서 어둠을 바라보는 거기에 외롭게 반짝이는 별.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다. 그 뒤 이 헛간은 스스로를 즐기는 공간이 되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가는 즈음, 초등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동네는 온통 텅텅 비었다. 정적뿐이다. 이따금씩 벌들의 웅웅거리는 소리와 소파리들의 들끓음이 정적을 갈라놓는다. 사람들은 삽과 괭이, 호미를 들고 들로 나가고 따가운 햇살과 마당으로 물결치며 내려 않는 따분한 그림자뿐이다.
헛간의 컴컴한 짚무덤에 누워 밖을 내다보면 반 틈 열린 문짝 사이로 햇볕이 파르르 끓는 마당이 보이고, 건너 뒷간 축대 위 앵두나무는 제 몸에서 피워 올린 꽃잎을 눈처럼 하얗게 털어놓고 있었다.

정막, 정지, 무엇인가 머무르던 일상이 먼 데로 흘러가 버리고 비어 있는 고요속에 허전함, 허망함 그런 감정이 공간에 체류하고 있었다. 세상을 살다가 언뜻언뜻 이쪽에서 다른 쪽의 세상 보기를 할 때면 투박한 판자 틈 사이로 보이는 빛과 빛이 파르륵 끓는 마당과 어두컴컴한 헛간을 생각한다.

노동을 끝내고 적당히 정돈되어 안도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삽과 괭이, 호미, 쇠갈구리처럼 그렇게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복잡다양한 시공을 떠나, 적당히 침침하고 어둠과 밝음이 대치한 공간속에 묻혀 머무르고 싶다. 망연자실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 때의 그 향기에 취해 한 몇 일 쯤 어정거리고 싶다. 아직도 매캐한 연기냄새 찌들어 있고,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그 공간에 누워 나를 찾아 부르는 옛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이제 소의 여물 씹는 소리도, 닭의 골골거리며 알 까는 소리도 다 시류에 흘러 가버렸지만, 아직까지 누군가의 인정 어린 손길을 기다리는 농기구들의 정겨운 정렬이 있는 그 공간에 갇히고 싶다. 단 몇 일 만이라도 그 곳에 갇히고 싶다.

강희동--------------------------------------------------------------------
1959년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출생으로 안동대학교 경영학과와 동국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문예사조' 수필부문과 '지구문학' 시부에 당선되었으며 현재 성림건설(주) 대표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