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출렁이게 하는 물의 나라, 임하호(글/이동백)길안천은 아름다운 강이다. 안포선이 개통되면서 많이 허물어지고 더럽혀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름다운 곳이고, 찾아오면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강이다.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 하나 무심히 보고 지나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깊은 골짜기를 구비구비 흘러내리는 이 강안(江岸)에는 백석탄, 신성 계곡, 천지갑산과 같은 비경이 숨어 있다. 천변 경개 좋은 곳에는 선비의 숨결이 깃든 방호정, 만휴정이 소슬하게 서 있기도 한다.
이 아름다운 냇물, 길안천이 급한 여울을 타고 살같이 흘러 와 반변천과 몸을 섞어 버리는 곳이 불거리 근처이다.
불거리
불거리는 반변천과 길안천이 만나면서 운명적으로 생겨난 하중도(河中島)이다. 반변천을 따라 떠내려오던 토사가 길안천의 강한 물살 때문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오랜 세월 거듭하면서 섬을 이루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불거리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불거리는 길안천을 밀고 내려가지 못하고, 그 위에 길쭉한 모양으로 반변천 안에 들어앉은 처지가 되었다.
불거리는 홍수가 나면 수침되는 곳이어서 당국에서 재해 지역으로 고시한 지역이다. 사람이 들어가 살기는 했지만, 홍수가 지면 고립은 물론이고,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임하댐이 만들어진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크게 줄었고, 웬만한 홍수에는 끄덕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사람들은 안심하고 여기에 터를 잡고 살게 된다. 언젠가부터 여기에 식당가가 조성되었고, 한때는 사람들이 들끓기도 했다. 음주가무를 한들 외진 곳이라 간섭을 하는 이도 없어 음주가무가 불가피한 모임으로는 좋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몇몇 식당이 성업중이나, 흥청거리던 옛날의 모습은 아닌 듯하다. 불거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마을의 식당 간판이 도열하고 있다. 대충 세어보니 일곱이다. 재해 지구를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세워진 이 간판들은 녹이 많은 슬어 있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았으나, 사람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휴일 점심 시각쯤인데도 마을은 적막하였다. 어느 식당 마당에는 자그마한 분수 하나가 혼자 쉼없이 하늘로 솟구치다 말고 주저앉고 있다. 마당가에 붉게 피어난 장미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미루나무를 끼고 마을을 질러 나가니, 강물이 진흙을 뒤집어쓰고 흐른다.
쓸쓸한 마을 분위기와는 다르게 농장에서는 사과나무가 싱싱하게 자라고, 영지버섯을 재배하는 비닐 하우스 여러 동이 줄지어 있다. 강가에는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새들의 노래와 신명나게 어울리고 있다. 팍팍한 자갈 길이 되어버린 강을 건너 34번 국도로 올라서는데, 차들이 앞길을 막고 마구 내닫는다.
불거리에서 임하댐 보조댐은 그야말로 지호지간이다. 사람의 기를 꺾어 놓기라도 하려는 듯, 기하학적인 이 구조물은 도발적인 모습으로 강을 가로지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것은 한번 좌절를 겪고 난 임하천 물줄기의 발목을 다시 낚아채 버리고 만다. 이 보조댐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흐르는 물은 흔적이 없고,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불거리만 보인다. 물줄기는 가늘고 강바닥은 온통 풀들이 뒤덮고 있다.
백운정과 반변천
보조댐을 건너 백운정으로 향했다. 강 건너편에는 철조망이 강을 에워싸고 있다. 통제 구역인 모양이다. 잡초가 뒤덮인 사이로 난 작은 길을 지나 차는 논두렁길로 들어섰다. 모가 심긴 논에는 이따금씩 개구리가 운다. 논둑에는 큰 뽕나무가 여러 그루가 검은 오디를 달고 쭉 서 있다. 오디도 탐스럽고 그 잎도 무성하다.
논둑길이 끝나는 곳에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에는 차 한 대 세울 만큼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회화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백운정으로 올라가는데, 길섶에는 찔레꽃과 애기똥풀 꽃이 예쁘게 피어 내방객을 맞아들였다. 굽잇길을 오르니 금방 백운정 마당. 우선 백운정 마당 입구에 선 표지판에 눈길이 머문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175호로 지정된 이 정자는 청계 김진 공의 둘째 아들 귀봉 김수일 공이 선조 원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공은 갈건야복(葛巾野服)으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으로 이 정자를 거닐며 산림을 즐기는 삶을 누렸다고 한다.
부암(傅巖) 기슭에 다소곳이 세워진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구조를 취하였다. 이 정자는 반변천 쪽으로 마루를 만듦으로써 반변천과 내앞 마을을 조망하기 좋도록 지어졌다. 마루 안쪽으로는 2칸 장방이 이어지고 있어, 우리 지방 정자의 일반적인 형태와 같은 구조를 취한다. 호남의 가객(歌客)인 정철의 정자, 송강정(松江亭)은 사면을 마루로 두르고, 그 가운데에 방을 하나 자그만하게 마련해 두었거니와, 이는 사방이 툭 트인 호남의 들녘을 일망무제로 바라보기 위해서이리라. 이에 비해 백운정은 산자락에 잇대어 지은 것이라서 마루와 방을 나란히 배치해 놓은 것일 게다. 모두 자연에 순응하면서 산 우리 선조들의 삶의 미학이 아니겠는가.
정자 마루에 오르니 우선 白雲亭을 각자(刻字)한 편액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 편액의 글씨는 미수 허목이 90세에 쓴 것인데, 마치 승천하는 구름의 모양 같다. 꼬리를 달고 하늘로 오르는 구름을 역동적으로 그려 놓았다. 이쯤되면 이는 글씨가 아니라 그림이다. 이 글씨에서 늙은 미수의 장난기를 느꼈다면 넌센스일까. 글자까지 희롱한 노대가의 유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듯하다. 장난기가 어리되 잡스럽지 않고, 유희가 넘치되 품격을 잃지 않는다. 또 하나 느낌을 주는 것은 이 글씨가 이른 아침 반변천 위로 서리서리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편액에 와서 걸린 듯하다는 점이다. 글자를 자연과 딱 어울리도록 형상화하기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러나 미수는 미구같이 전혀 힘 안 드리고, 그것을 이루어서, 후인들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편액 좌우로는 청계공의 시판과 귀봉 형제들의 시판 여덟 개와 백운정 보수기가 걸려있다. 日臨鏡面魚紋動 雲掃天心雁字稠
청계 선생의 「題白雲亭」의 함련( 聯)이다. 햇살 비치는 반변천 물낯바닥에는 물고기 뛰어 놀고, 구름 걷힌 하늘에는 물새 짙게 날아가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돗자리가 정갈하게 깔린 마루는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고, 그 한켠에는 방명록이 놓였다. 방에는 장롱과 이부자리가 준비되어 있고, 두다가 만 장기판이 아랫목에 놓여 있었다. 정자에 딸린 살림집에는 관리인인 듯한 사람이 들어 살고 있다. 퇴락한 대로 방치해 버린 여느 정자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다. 백운정은 늘 사람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래서 백운정은 반변천과 희노애락을 공유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존재한다.
백운정에서 내다본 내앞마을
백운정 마당에서 사위를 둘러본다. 동쪽으로는 약산의 날카로운 봉우리가 주위의 산자락을 양옆으로 활짝 펼쳐 보이고 있고, 그 아래 낮은 산줄기가 반변천으로 급하게 몰려들고 있다. 그 산줄기 밑으로 진흙을 뒤집어 쓴 반변천이 느릿느릿 흘러내린다. 반변천은 건너편 솔밭을 이끌고 백운정 앞을 지나 개호섬을 돌아 하류로 빠져나간다. 서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푸른 나무 사이로 반변천 강물이 흡사 써레질을 마친 논바닥처럼 보였다. 흙탕물 때문이었다. 임하댐이 완공되고 난 후 반변천은 이렇게 흙탕물이 흐를 때가 많다. 백운정에서 반변천 쪽은 급한 절벽을 이룬다. 이 절벽에는 복숭아나무, 상수리나무들이 구름 떼처럼 들어서 있다. 정수리만 보이는 이 나무들은 반변천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서 있다.
백운정 마루에 앉아 내앞〔川前〕 마을을 건너다 보면, 한 눈에 마을이 들어온다. 멀리 개호섬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친 데서 마을은 시작된다. 백운정 마루에 앉은 자리에서 좌측 사선으로 바라보이는 곳이 내앞 아랫마이고, 그 동쪽으로는 임동 나가는 길이 빗골을 따라 새로 뚫려서, 내앞 의성 김씨의 삶의 터전을 양단하고 있다. 그 길을 넘어서 임하댐 쪽으로 이어지는 삶터는 장구날이고, 그 장구날에서 위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동쪽 끝에서 우뚝하게 뭉쳐 서 있는 봉우리가 장구봉이다. 내앞은 개호섬에서 아랫마, 빗골, 장구날, 장구봉에 이르는 영역을 일컫는다. 그 안에 내앞 큰종가와 귀봉 종가가 어깨를 걸고 자리잡고 서 있고, 이를 구심점으로 하여 오랜 의성 김씨들의 역사가 반변천과 더불어 이어져 온 것이다.
택리지는 조선에서 양반 선비가 살 만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의 하나로 내앞을 꼽았고, 풍수지리에서도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밝은 달 아래에서 귀한 사람이 입는 옷을 세탁하는 형국)’으로 풀이하고 있어, 내앞이 그야말로 길지(吉地) 중의 길지임을 알려 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청계, 학봉, 운천 일송과 같은 걸출한 인재를 많이도 배출하였다.
유린당한 내앞 소나무숲
백운정을 뒤로하고, 다시 보조댐을 건너 내앞 마을로 향했다. 이 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만나게 되는 것은 반변천 안에 든 개호섬이다. 이 섬에는 오래 묵은 소나무가 서 있는데, 이를 개호송(開湖松)이라 한다. 의성김씨 내앞 종택의 풍수적인 여러 조건은 별로 흠잡을 것이 없으나, 한 가지 수구(水口)가 너무 넓게 터져 있다는 점이 거슬린다.
내앞 종택은 수구가 터진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수구막이를 조성하였다. 비보(裨補)를 한 것이다. 자연에 인위를 가하여 생기를 부과한 것이 바로 비보다. 개호송이 바로 이러한 비보 풍수의 전형적인 사례다. 내앞의 비보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없어져 버렸지만, 내앞 마을 앞으로 떡버드나무 숲을 강을 따라 조성한 것도 비보의 하나이다. 그 많던 떡버드나무 숲은 사라지고 지금 그 자리에는 둑이 쌓였다. 비보 역할을 하던 숲이 사라지자, 마을의 기운이 빠져나간다는 우려의 소리가 나왔던 모양이다. 지금 이 둑에는 마을 청년들이 힘을 모아 나무를 심어 놓았다.
이 둑을 따라 올라가면 내앞 마을의 명물인 또 한 무리의 소나무 숲을 만난다. 백운정과 잘 어울리고, 내앞을 아름다운 마을로 인상지어 주는 것이 이 소나무이다. 흰 모래톱과 푸른 소나무의 만남 또한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이 숲에서 백운정을 건너다 보는 즐거움도 크거니와 강심에 낚시를 걸어 놓고 세월을 즐길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이 솔숲이다. 때로는 시인묵객이 찾아 시 한 수 얻어가기도 하였을 것이고, 일세를 휘어잡고 놀던 한량들도 찾아 한바탕 거나한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으리라.
그런데 뭇 사람의 사랑을 받던 이 숲이 언제인가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다. 떡버드나무들이 베여 나가고, 강에 둑이 쌓이고, 댐이 만들어지면서 소나무들은 시련을 겪게 된 것이다. 솔 숲 안으로 들어갔을 때 소나무가 겪는 아픔이, 백운정에서 바라보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깊고 심각했다. 백운정에서 받은 느낌은 소나무 두어 그루가 죽어가고 있구나 하는 정도였다. 숲 안에는 철골과 시멘트로 얽어 만든 식당과 매점들이 어지럽게 들어서 있고, 개와 닭의 사육장까지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나마 조금 남은 빈 공간에는 자동차가 아무렇게나 주차 중이었다. 그야말로 나무는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겪어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큰 소나무 두 그루는 이미 명줄을 놓아 버렸고, 어느 식당 앞에서는 큰 가지 하나를 잃은 소나무가 기우는 몸체를 가누느라 혼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인간에게 할퀴고, 허물어지고, 유린당한 내앞 마을의 소나무 숲, 500년 동안 내앞 마을을 수호해 왔던 이 숲의 사명감을 여기서 마침표를 찍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는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조상의 깊은 뜻을 새기고 마을의 비보로서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누군가 나서야할 것 같다. 일차적으로 그 일을 할 사람은 내앞 마을 의성 김문인 것 같다. 문중 차원에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인간 가까이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두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물의나라 임하호
무거운 심정으로 솔숲을 떠나 길을 잡은 곳은 임하댐이었다. 임하댐으로 가기 전에 다리 하나를 건너 임하 마을을 둘러보았다. 비닐 하우스가 작은 들판에 빼곡히 들어찼다. 폐교된 학교 근처에는 3층 석탑이 내리쬐는 햇살 아래 희미하게 서 있다. 임하댐 조성으로 피난 나온 고가가 나지막한 산자락에 기대섰다. 국탄댁이다. 국탄댁을 지나, 가던 길을 한참 가니 백운정에서 상류로 조금 거슬러 올라온 반변천 물가였다. 소나무 숲이 바로 건너다 보이고, 물가에는 낚시꾼 하나가 낚싯대를 걸어놓고 하염없이 졸고 앉았다.
다시 돌아나와 그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휘어들자, 저 멀리 임하댐이 거대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한 무리의 구름 그림자가 댐에 잠시 머물다가 흘러간다. 길이 막히는 지점까지 한 달음에 내달아 임하댐 발치에 발을 멈췄다. 자유분방하던 스카이라인이 댐에 이르러서는 선 하나를 곧게 긋고 지나간다. 댐은 예각으로 뻗은 산줄기와 둔각으로 쭉 뻗어 흘러가는 산줄기에 양어깨를 걸치고 있다. 산 하나가 온통 댐에 가려 버리고, 그 꼭대기를 조금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댐 아래 강바닥에는 흙탕물이 겨우 흐르는 시늉만 낼 뿐, 물때가 낀 돌맹이들만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흥성스럽게 뻗어내려야 할 반변천의 물줄기가 여기서 그 기를 무참하게 꺾고 있는 것이다. 깊은 숨을 쉬어보지만, 강은 이제 스스로 흘러내릴 수 없다. 자연은 인간에게 한번 심한 패배감에 몸을 부르르 떨어보지만, 그것뿐이다. 적어도 여기서만큼 자연은 인간 앞에 무력해지고 만다. 이쯤에서 나는 인간의 힘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힘을 가늠하기 어려운 것은 댐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의 나라, 세심정에서 바라다 본 임하호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물의 나라였다. 골짜기마다 들어찬 물은 인간의 마음을 주눅들게 하였다. 호수 위로 우뚝 선 취수탑 또한 사람을 기죽게 만들었다. 이 호수에서 사람은 기가 죽을 일밖에 없는가 보다. 관광객들은 그렇지만도 아니한 모양이다. 모두 불콰한 낯빛으로 무엇이 그리 좋은지 그저 싱글벙글거린다. 비둘기 날개 위에 물빛이 도는 걸 보며, 댐을 떠났다.
무실 이주 단지
높은 망천교를 지나고, 장승 공원이란 푯말을 지나 임동까지 내쳐 지나갔다. 가랫재로 막 올라서는 곳에서 우측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봄비가 많은 탓인지 물은 가랫재 초입까지 밀려와 있었다. 이 길은 박실까지 임하호를 따라 가다가 지례예술촌으로 빠진다. 좁은 길을 몇 구비 돌아나가니, 임동면 소재지가 호수 건너편으로 다가온다. 챗거리 장터를 물에 빼앗기고 산기슭으로 좇겨난 임동, 그 옛날 챗거리 장터가 지니던 힘을 잃어 버린 채 어지간히도 위축되어 버린 마을, 임동이 늦은 오후 어스름 속에 고즈넉했다. 그나마 마을 뒤로 소방학교 큰 건물이 마을을 살아 숨쉬게 하는 듯했다. 모터보트 하나가 꽁무니에 사람을 매달고 쏜살같이 호면을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수상스키를 즐기는 사람이다. 물너울이 호숫가 물풀에 와 하얗게 부서진다.
수곡교 아득히 높은 곳에 무실 이주 단지가 호수를 내려다 보고 있다. 무실 이주 단지에는 전주 류씨 수곡파 종택을 비롯하여 몇 채의 와가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지금 깊은 물 속에 잠겨 버린 무실은 전주 류씨가 터를 잡고 430여 년을 살아온 곳이다. 류희걸 편저 [岐下水柳]에서 水上 水下 三村 모두는 전주 류씨 일가로 무실은 큰집인데, 박실과 고래골로 문사 펼치며 억만 고초 마다않고 水柳一族이 살아왔고, 100여호 너른 대촌 모두가 岐峰 할배 자손으로 崇祖하고 敦睦하며 명문으로 번성하니, 유림들을 우리를 무실류씨라 불렀다.라고 적고 있다. 이런 벌족이 고향을 물 속에 묻고, 기약없이 떠나야만 했다. 일부는 해평 일선리로 옮겨가고 일부는 이 곳에 남아 상전벽해가 되어 버린 옛터전을 내려다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임하호에서 가장 넓은 곳이 이곳 무실이다. 일망무제, 물 끝이 까마득히 멀다. 무실 류씨의 망향의 가슴속이야 어찌되었든 망경창파 위로 햇살이 수만 조각으로 부서진다. 조금 전 댐에서 느꼈던 기분과는 사뭇 다르다. 수류일족의 망향의 아픔도 여기서는 뒤로 밀어 두고 싶다. 막힌 가슴이 툭 터지는 기분이다. 세상 일에 마음 상한 일이 있으면, 이 호숫가로 와서 무심히 호수를 내다볼 일이다.
그래 무심히, 그 염결(廉潔)의 마음으로.
그러면 가슴에서 출렁이는 물소리 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