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그 낯선 문화(글/김원길)안동은 개화가 늦다보니 신문명에 익숙지 않아 저지른 실수담도 많았던 반면, 남보다 먼저 자제에게 신학문을 배우게 하려고 일본 등 객지로 내 보낸 집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상해로 건너간 사람들, 유교적 관습이 싫어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 등등이 전통적 의식과 관습을 잊어버려 고향에 돌아와서 저지른 해프닝 또한 적지 않았다. 하물며 안동의 풍속을 알 리 없는 외국인들과 신세대가 보여 준 반응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① 갓 알
민속학을 전공한 한 젊은 교수한테 그의 아버지가 심부름을 보냈다. 이웃집 노인댁에 가서 갓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이윽고 갓을 받아 든 아버지가 놀라며 아들에게 물었다.
"왜 이것 밖에 없느냐?"
"그게 갓이잖니껴"
"이 안엣 것이 있어야제"
"갓알까지 가져오라고 했어야지요"
"갓알? 예끼, 숙맥 같은 것!"
☞ 군소리
갓을 안써 본 독자를 위해 말하거니와 갓은 탕건위에 쓰는 것이고 탕건은 갓 아래에 받쳐 쓰는 관이다. 갓과 함께 따라 다니는 탕건이란 게 있는 지 몰랐던 이 젊은 교수는 그걸 갓알이라고 한 것이다.
② 상석(床石)에서 절하다
독립 운동사에 그 이름이 혁혁한 모 인사는 중국 등 해외에서 오래 생활을 한 개화파로서 광복 후 고향에 돌아 왔을 때는 양친이 모두 돌아가신 후였다. 봉양 한번 제대로 못하고 임종도 지키지 못한 그가 집안 어른들의 안내를 받아 부모의 산소를 찾았을 때 그 통한이 어떠했으랴. 그런데, 그는 향로석에 구두를 벗어 놓고 상석 위에서 절을 하는 게 아닌가!
☞ 군소리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젊은 독자를 위해 설명하거니와 향로석이란, 상석 앞에 향로를 올려놓는 조그만 돌이고, 상석이란 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 놓는 돌상을 말한다. 감정이 복 바치다 보면 이성을 잃게 마련이겠지만 적어도 유자(儒者)는 감정통제에 관한 한 상당한 수련을 쌓은 사람들이다. 위의 사태는 몰이성의 상태가 아니라 몰지각의 소치이다.
③ 이불베드
1994년 여름 외국 사절단 10여명이 지례예술촌을 방문하였을 때다.
저녁 식사 후 정원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마시고 부르고, 마시고 부르다가 모두 술에 취했다. 주인도 취하여 그들에게 꼭 해줘야 할 이야기를 빠뜨리고 자러 가 버렸다.
이튿날 그들이 자고 나간 방안을 보고 아내가 나를 불렀다. 아, 어쩜 이럴 수가!
벽장안의 이불이란 이불을 다 꺼내어 겹겹이 포개어선 더블베드를 만들고 내외가 각각 요 하나씩을 덮고 잔 것이다. 방바닥엔 신발자국이 낭자했다.
안사람이 중얼거렸다.
"연구 많이 했구만요"
④ 왠 군 복무기간?
1987년 가을 프랑스 국회의원 피에르 로베르 구스데씨가 지례마을을 방문했을 때다.
차가 문앞에 도착하자 차문 밖으로 상복(喪服)에 두건을 쓴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차 안에서 그는 내게 물었다.
"저게 누구요?"
"우리 아버지가 마중 나오신 거요"
"왜 저런 복장을 하고 계시지요?"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 가셨기 때문에 삼년 동안 저런 복장을 하는 겁니다."
"왜 그게 군 복무기간과 같습니까?"
☞ 군소리
실제로 요즘 군 복무기간은 만 삼년이 못된다. 부모 상기(喪期)도 탈상(脫喪)까지는 만 이년이니 상복은 실제로는 2년 동안만 입는다. 상기 삼년이란 심상(心喪) 일년을 보태어 말하는 것이다. 심상이란 상복은 입지 않되 상제와 같은 마음으로 슬퍼하며 상중에 있는 것 같이 근신하는 일.
⑤ 여학생부군(女學生婦君)
안동지방에서도 아버님(先考) 제삿날에 지방을 쓸 때 가끔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 쓰는 집이 있다.
([학생]대신 [처사(處士)]라 쓰는 집이 더 많다.)
대학을 갓 나온 X세대 청년에게 어머니 기일(忌日)에 지방을 쓰라 했다. 컴퓨터 앞에 앉더니 A4용지 반 장에 세로로 다음과 같이 쳐 왔다.
[女學生婦君神位(여학생부군신위)]
☞ 군소리
이 청년의 경우 [현비유인모봉모씨 신위(顯 孺人某封某氏神位)] 즉 어머니가 안동권씨인 경우 [顯 孺人安東權氏神位]라고 써야 했다. [ ]는 돌아가신 어머니란 뜻이고 [孺人]은 생전에 벼슬하지 않은 남자([처사] 또는 [학생])의 안해의 신주(神主)나 명정(銘旌)에 쓰는 존칭이다.
그런데 청년이 [顯 孺人…]이라 쓰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의 컴퓨터에 [죽은 에미 비( )]자(字)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니, 할머니, 증조모, 고조모 등 비위( 位)의 지방을 쓸 때마다 써야 하는[ ]자가 컴퓨터에 더러 입력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지금 우리 사회가 전통제의(祭儀)를 그만큼 무시한다는 증좌이기도 하다.
만약, 남편이 벼슬을 했으면 그 품계에 따라 부인도 [端人] [安人] [宜人] [恭人] [淑人] [淑夫人] [貞夫人] [貞敬夫人]등등으로 칭호가 달라졌다. 이것은 관료와 남성만 대단하게 여기던 조선시대식 분류 방법이다.
왕조시대가 아닌 대한민국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의 부인을 [정경부인]이라 할 수 없듯이 [유인]이라 해서도 안된다. 유인은 남편이 [처사]나 [학생]인 경우 또는 9품 벼슬아치의 안해에 한해서 쓰는 칭호이건만 아직도 안동에선 남편의 직종과 직위에 관계없이 무조건 [유인]을 쓰고 있다.
대학총장의 부인이 죽어도 [유인]일 뿐이며 여성시장(市長)이 죽어도 [유인]일 뿐이다. 그러면 이들의 남편은 [학생]라 쓸 것인가! 이러한 불합리 때문에 정부는 가정의례 준칙에서 [아버님神位] [어머님某封某氏神位]로 하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님신위만큼은 본관과 성씨를 밝히고 있다. 안 그러면 생모와 양모와 계모 중 어느 분 신위인지를 어떻게 알 것인가? 이 청년은 [어머님 安東權氏 神位]라 언문진서 섞어 쓰면 옳다. 성씨를 써 놔도 글자를 못 읽는 아이들과 어느 어머닌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 지방과 함께 영정 사진을 모시는 것이 최상의 방책인 것이다.
⑥ 성리학(性理學)
어느 날 도산서원에 외국인을 가득 태운 관광버스가 도착했다.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의 영문을 읽어 주는 건 좋았는데 한 외국인이 성리학(性理學)]이 무어냐고 물었다. 미국 유학을 하고 온 이 아가씨는 한문과 영어에 두루 통달하고 있었다.
"I think it＇s a kind of theory about sex"
(그건 성이론(性理論)인 줄 압니다.)
"와우! 이 퇴계가 조선시대에 섹스의 이론을 집대성 했다구요?"
한국학을 전공한 미국인이 한국말로 반문했다.
⑦ C.I.A
군복을 입고 온 도회지 청년이 어느 시골 노인에게 인사를 했단다.
"시하(侍下)신가?"하고 묻자 고개를 갸우뚱하던 청년은 그걸 "C.I.C (방첩부대)인가?"로 받아들여서
"아뇨. 전 C.I.D(군사범죄수사대)입니다."라고 대답했단 일화가 있다.
너무나 유명한 이 일화는 나이 많은 안동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십 수년 전 나는 모 대학의 젊은 교수 한 사람을 안내하여 안동 어느 마을의 노인 선비 한 분을 찾아 뵙게 되었다. 서울 출신의 이 교수는 이 지방의 학술조사가 목적이었고 나는 그 노인이 마침 친상을 당한 후라서 문상도 겸하여야 했다. 빈소가 있는 상청 문간엔 짚과 새끼로 여막(廬幕)이 쳐져 있었다.
"이게 뭐야?" 교수가 혼잣말로 물었다.
"여막이지"
"…"
나는 기침을 세 번하고 상청에 올라 빈소의 휘장을 열고 꿇어앉아 분향을 하고 있는데 안채에서 흰 두루마기에 두건을 쓴 노인이 나오셔서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을 했다. 나는 "어이어이" 몇 번 곡을 하고 배례를 하고 상주를 향해 절을 하였다. 교수를 소개하려고 그를 돌아보니 아직 방 뒤쪽에 두 손잡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눈짓으로 불러 노인에게 인사를 시키고 "이 사람은 예수를 믿어 놔서…"라고 했다.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만이 이 견문 없는 교수를 노인에게 이해시키는 방책이었다. 노인은 내게
"왕존장(王尊丈) 편하신가?"
"예"
"시상(侍上)과 완장(阮丈)도 잘 계시는가?"
"예 저희는 첨절(添節)이 없습니다."
안에서 내 온 감홍시를 들며 손님을 데리고 온 용건을 말했다.
나는 그가 안동지방의 유교문화에 대한 조사를 하러 다닌다는 것을 말하고 그가 이 지방의 전통예법을 잘 모르는 이유를 암시하려고 그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것을 수차 강조했다.
"그래 관향은 어디시오?"
"…? 서울이 고향입니다."
"전주 이씨랍니다."
내가 얼른 끼어 들었다.
"국족이로군… 시하시오?"
"네?"
"아버지가 계시냐구"
내가 또 통역을 했다.
"예"
"실례오만 시상께선 무얼 하시오?"
"제 아버지는 정보부에 근무합니다."
"이번엔 C.I.A(중앙정보국)로구만"하며 노인은 상청인 것도 잊고 클클클클 웃어 재꼈다.
대문을 나서자 교수가 말했다.
"와, 땀 뺐네, 무슨 말들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노인이 C.I.A는 어떻게 알지요?"
"신기할 거 없네. 그 노인 C.I.C, C.I.D까지 다 알고 있네."
☞ 군소리
6.25를 겪으면서 우리에겐 미군과 함께 서양 바람이 불어 닥쳤고 5·16이후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향촌사회가 와해되자 구식 인사법과 존칭과 지칭이 날아가 버렸다. 절 대신 악수를 하고 왕존장(王尊丈)은 할아버지, 시상(侍上)은 아버지, 완장(阮丈)은 삼촌으로 격하되었다. 평등사회로 가자는 뜻인지는 몰라도, 이것도 일종의 하향 평준화이고 인간에 대한 평가가 옛날에 비해 많이 절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추세 가운데서도 유독 안동의 노인 사회엔 구습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수인사를 포함한 안동 사람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외지인들은 [왕따]당한 느낌을 견디다 못해 그만 안동 사람들을 [배타적]이라 매도하고 마는 것이다.
"완장 잘 계시는가?"를 못 알아듣고 "완장(腕章)은 집에 두고 왔습니다."라고 하는 객지 사람과 친교가 이루어지기는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