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버림, 故전우익 선생(글/이정희)
언눔 전우익 선생(79)이 아름다운 버림을 행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한번 찾아보기도 전에 말이다. 출입처가 영주·봉화로 바뀌면서 아이템을 찾는 내게 누군가가 전우익 선생을 한번 만나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뒤 출근길에 취재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전우익 선생, 돌아가셨다고…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1993, 현암사)의 저자로, 허름하기 짝이 없는 늙은 농사꾼의 모습이 방송을 타면서 선생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소위 ‘농부작가라기 보다는 철학자. 사상가에 가깝다는 게 그를 평하는 이들의 의견이다.
이름 없는 무명씨를 뜻하는 언눔을 아호로 썼던 전우익 선생, 그의 약력은 대략 이렇다. 1925년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경성제대(서울대의 전신)를 중퇴하고 해방 후 ‘민청에서 사회주의운동을 하다 사회안전법에 연루돼 6년 남짓 옥살이를 했다. 그 후 보호관찰 처분을 받아 집 밖으로는 나다닐 수 없는 감시를 65살까지 받았다. 그러니까 진정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다.
그는 보호관찰처분과 동시에 지금까지 50여년을 고향에서 홀로 농사짓고 나무를 기르며 살아왔다. 1993년 신경림 시인의 주선으로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펴냈지만 대중적인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지난 2002년 MBC의 ‘느낌표를 통해 좋은 책으로 선정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은 선생이 가까운 안동에 사는 동화작가 권정생씨,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김용택 시인 등 가까운 지인들에게 틈틈이 보낸 편지글을 모은 것이다. 지금까지 100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이밖에도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니까’, ‘사람이 뭔데’등 2권의 수필집을 더 펴내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글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의 글 소재의 상당 부분은 나무, 자연… 이런 것들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무를 심는 일은 희망을 심는 일과 같다고 했다. 나무는 세상을 사는 바른 이치와 사람의 길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무나 동물들보다도 못하다고 했다. 그것들이 사람보다 더 정직하기 때문이다. 또 자기가 취할 만큼만 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더 많이, 더 높이만 추구하려 한다.
“이쪽엔 돌쩌귀에 불이 나는 불고기 집 즐비하게 늘어섰고, 저쪽엔 밤새 불 켜진 어머어마한 병원이 생겼습니다.”
[사람이 뭔데..中]
그의 글은 욕망을 쫓고 사는 우리들에게 낮은 목소리지만 아주 날카롭게 꾸짖는다. 혼탁한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맑고 깨끗한 삶의 지혜를 일깨워 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의 글을 읽고 감동한다.
“큰 것이 다 좋은 건 아니지만 참된 뜻의 큼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달고 있던 뿌리를 잘라 버려야 한다는 교훈 같기도 해요. 뿌리는 근본인데 사람이 바뀌자면 역시 근본이 바뀌지 않고서는 새로운 사람이 탄생할 수 없고, 새로운 사람들의 집단적인 탄생 없이는 세상은 바뀌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도나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사람이 바뀐 토대 위에서 제도가 새로워지는 것이 진짜 발전이지요.
사람은 그대로인데 제도만 바뀌어서야 페인트칠만 바뀐 가짜가 아닐까요? 그럴싸한 이론을 줄줄 외우고, 민중, 민중 하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삶이 말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을 때때로 봅니다. 그것이 저의 자화상 같아 더욱 씁쓸해요."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中]
선생은 늘 단추 떨어진 셔츠에 때 묻은 바지차림으로 사랑채 마루에 앉아 책을 읽곤 했다.
선생의 빈소가 차려지고 취재를 위해 자택을 찾았다. 돌아가시고 정리를 한 듯한 행랑채 책꽂이엔 온기가 식지 않은 책이 가득 쌓여 있었다. 맑스.레닌에서부터 감옥에서의 사색, 정치가들이 보내 온 자서전, 농사책 등등. 겉보기엔 시골에 묻혀 평생을 보낸 촌로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해박한 지식, 사상은 누구도 쉽게 범할 수 없는 것이라 짐작됐다.
앞마당에는 선생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나무들이 꼿꼿이 서 있었다. 주목, 함박꽃나무, 단풍나무, 산수유나무 등등. 나무 가지에는 곧은 글씨로 일일이 이름표를 달아놓았다.
선생을 직간접적으로 본 사람들은 그가 늘 당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남들이 볼 때는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권력, 명예, 돈… 사실 이런 우스운 것들을 선생은 정말 우습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려받은 땅도 꽤 있고 책이 잘 팔리면서 인세도 억대 이상이었지만 자신을 위해서나 자식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너무도 가난하게 살았지만 늘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 낡은 바지가 열개씩이나 된다고 하시며.
선생은 평소에 당신의 장례는 절대 나무관을 쓰지 말고 불에 잘 타는 종이로 된 관을 써서 화장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임종 때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조용히 화장해서 뿌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장례식장에는 그 흔한 대형 화한 하나 없었고 선생과 가깝게 지냈던 ‘유명한’ 인사들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가족들은 선생의 유언대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화장으로 조용히 장례를 치뤘다.
“가을의 낙엽에서는 버림, 청산을 결행하고 겨울의 얼어붙은 솔잎에서는 극한의 역경에서도 끝내 지켜야 할 것은 지키라는 것을 온몸으로 배운다고 여기면서도 그게 쉽지 않고...버릴 줄 알아야 지킬 줄 알겠는데 버리지 못하니까 지키지 못합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中]<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