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의 명부, 향안(鄕案)(글/정진영)
누가 양반인가?
양반이란 말은 오늘날에도 그리 낯설지가 않다. 안동에서는 더욱 흔하게 들어보는 말이다. 그래서 누가 양반이고 아닌지를 확신에 가까울 정도로 판별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오늘날이 이러하니 조선시대야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는 양반 상놈을 엄격히 구별하는 것을 전제로 한 세상이었으니. 그러나 조선시대라고 해서 양반이란 존재를 우리의 희망과 같이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양반과 상놈의 경계선에는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반이란 말은 아주 폭넓고도 다양하게 쓰여 왔다. 원래는 고려시대 문반과 무반을 지칭하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양반이란 말이 지배신분층을 지칭하는 의미로서 보다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조선시대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양반이라는 용어가 법제적으로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누가 양반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더욱이 세상은 어느 때 없이 변화하기 마련이고, 신분 역시 고정불변일 수만은 없었다. 따라서 양반의 구체적인 대상과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신분적으로 양반이라는 것과는 달리 ‘이 양반, 저 양반’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던 것은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신분제사회에서 신분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이것은 바로 체제를 유지하는 문제와 직결된 것이다. 그래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거의 모든 문서에는 신분이 기재되기 마련이었다. 호적(戶籍)이니, 호패(號牌)니 하는 국가의 공적 기록에는 물론이고, 개인간의 사문서에도 반드시 신분을 표기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여기에 양반이니 평민이니 하는 식으로 적었던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종사하는 직역(職役)을 기재하였다. 이것이 사실상 신분을 구분하는 근거였다.
양반이란 말은 사대부란 말과도 통용되었고, 또 사족(士族)이라고도 하였다. 사대부란 독서하는 선비(士)와 전현직 관료(大夫)를 일컫는다. 전현직 관료라 하더라도 선비에서 출발하였고, 또 신분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문을 단위로 결정되는 까닭에 이들을 사족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선비가 관료가 되는 일반적인 방법은 과거를 통해서였지만, 공신 또는 고관을 역임한 자들의 자손에게는 음직(蔭職)이 주어지기도 하였고, 충순위(忠順衛)·충찬위(忠贊衛)등을 두어 국가유공자의 후손을 예우하기도 하였다. 이러함에도 모든 양반은 관직이나 품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관직이나 품계를 가지지 않은 이들을 통칭해서 유학(幼學)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양반이란 크게는 유학층을 기반으로 하여 전현직 관료와 품계(品階)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농업 등의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대체로 16세기 이후에는 국가에 대한 군역의 부담을 지지 않는 특권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반을 이러한 직역으로만 구분하기엔 어려울 때도 있게 된다. 가령 관직과 품계를 가졌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평·천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평·천민층은 돈으로 공명첩(空名帖)이니 납속첩(納粟帖)이니 하는 것을 살 수도 있었고, 양반의 일반적인 호칭이던 유학을 모칭하기도 하였다. 하층민들이 18, 19세기 이러한 방법을 통해 양반으로 행세한다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아무튼 18세기 이후에는 직역만으로는 양반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가 몹시 어렵게 된다. 그래서 양반을 직역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판별해야 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혹자는 당시대인들의 인식을 기준으로 누가 양반인지를 가려야 하며, 이 같은 기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현조(顯祖)의 존재라고 한다. 즉 직계 조상 중에 학문이나 관직상으로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양반으로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 지역사회에서는 나름대로의 기준에 의해 양반중의 양반을 구별하고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문족(門族)이니 세족(世族) 또는 청문사족(淸門士族)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청문사족 등으로 불리던 양반들의 대부분은 다름 아닌 여말선초 향리들의 후예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양반지배 체제가 확립되어 가면서 청문사족으로 자칭하였던 양반들은 자신을 향리들과 엄격히 구분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과정에서 작성된 것이 고을 양반들의 명부라고 할 수 있는 향안(鄕案)이다.
안동의 향안, 향록(鄕錄)
양반의 명부인 향안은 각 고을 단위로 작성되었다. 향안에의 등재는 곧 지역사회에서 양반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므로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여기에 문제가 있게 되면 엄청난 분란이 일어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각 고을에서는 각기 향안에 입록하는 절차와 자격을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었는데, 이를 향규(鄕規)라고 하였다.
안동에서도 향규와 그에 따라 작성된 향안이 있다. 전자는 《영가지》에 〈구규(舊規)〉와 〈신정십조(新定十條)〉로 전해지고, 후자는 금계의 학봉 유물전시관인 운장각(雲章閣)과 하회의 서애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 등에 ‘향록(鄕錄)’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양반의 명부인 향안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외(內外) 사족으로 허물이 없어야 했다. 여기서 내외 사족이란 아버지와 어머니 가계 모두가 향안에 참여하고 있는 가문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허물이란 향리, 서얼의 후손이거나 이들과 결혼한 가문, 자신에 윤리도덕상의 중대과실자 등을 말한다. 따라서 자신은 물론이고 부계와 모계에 이러한 흠집이 있는지를 조사해서 결격사유가 없는 경우에만 입록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최소한의 기준일 뿐이었다. 충분조건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처의 가계가 포함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우를 삼향(三鄕)·삼참(三參)이라고 하였다. 삼참의 경우는 자신에 윤리 도덕적인 큰 허물이 없으면 곧 바로 향안에 등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참의 경우는 이미 향안에 등록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과 이전에 좌수·별감을 역임하였던 원로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입록이 가능했다.
아무튼 향록으로 이름 붙여진 안동의 향안은 모두 10건이 현존하고 있다. 가장 연대가 오랜 것은 1530년, 가장 늦은 것은 1774년이고, 10건의 향안에 등재된 인물 수는 3천5백여 명에 달한다.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성씨는 모두 46개이고, 이 가운데 권(안동), 김(의성), 남(영양), 유(풍산, 전주), 이(예안, 진보, 고성), 정(청주) 등 6개 성씨가 16세기를 제외하고는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들 성씨는 대·소과 합격자 뿐 아니라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좌수·별감의 70～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안동의 양반사회는 이들 성씨가 실질적으로 주도했다고도 할 수 있다.
향안 작성,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향안은 5년마다 새로운 향원(鄕員)을 등록하도록 되어 있다. 말하자면 5년마다 다시 작성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다면 안동에는 40～50여 건의 향안이 있을법하다. 그러나 현존하는 향안은 겨우 10건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료의 보관이 허술해서가 아니라 실재 이것만이 작성되었을 뿐이다. 20년·30년, 심지어는 50년이 지나도록 향안을 작성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향안이 작성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참여자들을 선정하여 향중에 대한 가부를 물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더라도 몇몇 사람들이 반대를 하면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실재로 안동에서는 현존하는 향안 외에도 많은 향안들이 당시의 좌수·별감들을 중심으로 작성되었지만, 향중(鄕中)에서 물의(物議)나 원로들의 비난으로, 혹은 취사(取捨)가 불공정하다는 이유 등으로 파기되기 일쑤였다. 향안 작성을 둘러싼 문제의 핵심은 다름 아닌 이참인(二參人)을 취사선택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개인적인 혹은 가문간의 갈등과 대립이 없지 않았음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향안이 오랫동안 작성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향안은 단지 양반들의 이름만을 적어두는 장부는 아니었다. 향안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지배 조직인 향사당 혹은 향청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명부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향사당의 좌수와 별감 등은 반드시 향안에 입록된 사람으로 한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작성되지 못하여 새로운 인물들이 충원되지 못하면, 향안은 노쇠해 질 수밖에 없게 된다. 70된 늙은이로 좌수·별감을 추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매년 좌수와 별감을 추천하는 일이 지극히 군색해 질 수밖에 없었다. 안동에서는 이 같은 사정으로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삼참인으로 한정하여 향안을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안동의 향안은 늘 일시의 방편에 따른 부득이한 것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참인을 제외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였다. 이참인은 향안에 입록되지 못함으로써 원한을 품게 마련이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좌수와 별감들은 뒷날 이들이 다시 입록되어 원통함을 씻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실재로 몇몇의 향안은 삼참만이 아니라 이참을 허용함으로써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향안이 양반의 명부라고 하더라도 향안에의 등재여부가 양반과 상놈을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양반이냐를 따지는 문제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삼참과 이참은 얼마만한 거리가 있는 것일까? 형제간에도 처향에 따라 차별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순수 혈통 찾기’는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향안의 작성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서얼, 우리도 양반이다
향안은 향촌의 양반들의 존재와 그들에 의한 향촌지배를 가늠해 보는 중요한 척도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이러한 향안에 적지 않은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지방관과 서얼들의 등장이었다. 전자는 양반들의 향촌지배 핵심이 되고 있는 견제의 당사자라는 측면에서, 후자는 향안에서 가장 중요한 차별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향안은 향촌 양반들이 향청을 통해 수령을 견제하고 향리들을 통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런데 18세기 초반부터 안동부사와 경상감사 등이 이런 저런 연고를 핑계하여 향안의 첫머리에 입록되어 있다. 이것은 수령의 입장에서는 고을의 행정적인 수반으로서 뿐만 아니라 향원의 자격으로 향중의 일에 관여하거나 자문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안동 양반들로서는 노론 전제라는 변화된 정치 환경 속에서 관권 또는 노론세력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양반 고을로 자처하던 안동에서도 18세기 이후에는 향촌사회를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향안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은 엄격하였다. 그것은 향안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삶에서도 그러했다. 서얼은 혈연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학문적 기반에 있어서도 적손의 양반 자식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얼은 18세기 이후에 법제적이며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차별철폐를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앙관직에서만이 아니라 향촌사회에 있어서도 향안(鄕案)·교안(校案)·원안(院案) 등 이른바 삼안(三案)에의 입록과 입록의 순차를 나이에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같은 서얼의 요구는 영조 년간을 거쳐 정조 원년(1777년)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수용되었다. 이제 향안에서도 서얼의 참여는 허용되어야 했다. 향안에 서얼이 참여한다면, 그것은 향안체제의 전면적인 부정을 의미한다. 향안에서는 서얼과 향리들의 참여를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의 이러한 조치에 안동의 양반사회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안동의 양반들이라면 이를 정면에서 거부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안동의 양반들도 조정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 같은 사정은 1773년에 작성된 향안의 235명 가운데 46명의 서얼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이에 따른[序齒] 완전한 통동(通同)이 아니라 말미에 ‘신통(新通)’이라는 이름으로 별도로 등재한 것이었다. 당연히 서얼들은 나라 법을 들먹이면서 항의하였을 것이다. 나라 법 앞에 안동의 양반들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해인 1774년에는 이전의 향안을 파기[罷案]하고 다시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안동 양반의 체통을 여지없이 구겨버린 사건이었다. 이후 안동의 양반들은 이에 대해 두 가지의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하나는 파기해야 할 향안을 파기하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향안을 작성하지 않는 것이었다. ‘파안(罷案)’이라고 주기(朱記)된 향안이 버젓이 남아 있는 것은 이 같은 사정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결국 서얼이 누구인지를 그대로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또한 그러하다. 양반들은 이미 누대에 걸친 향안 입록으로 향촌사회에서의 신분과 사회적인 특권과 권위를 이미 확보한 셈이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굳이 서얼과 어깨를 나란히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후 향안은 더 이상 작성되지 않았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서얼들의 등장과 향안의 종식을 크게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양반 중심의 사회에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에는 서얼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를 기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키고 있었던 요호(饒戶) 혹은 부민(富民)들도 주목된다. 이 같은 현상을 한편에서는 양반들의 향권(鄕權) 상실이라고 하기도 하고, 봉건제의 해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본래 모습과는 크게 다른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하여 이를 향권 상실이니, 봉건제의 해체니 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다. 그것은 안동의 경우에서도 확인되듯이 양반들 스스로가 향안을 종식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이 이후에도 안동의 좌수와 별감은 여전히 명문사족가문에서 독점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서얼이나 요호·부민이 양반들과 다른 이념과 체제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변화를 담당할 주체가 아직은 전혀 새롭지 못하였던 것이다.
변화란 새로운 존재의 등장만으로는 부족하다. 성급했다면 아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그만큼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