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墨香)으로 드러나는 안동사람, 김부경씨(글/천남희)
서울생활 15년이라지만 길 눈, 사람 눈 어두운 안동 촌 댁은 버스 타는 것조차 아직은 낯설다.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오다 안동지를 들고 김부경(54)선생이 운영하는 강동구 명일동의 대명서실을 찾아 나선 날은 눈이라도 내릴 것처럼 구름 안은 하늘이 무거워 보였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의 답답함과는 달리 서실 안은 실내가득 먹 향이 베어있고 편안하며 따뜻했다. 몇 번 인사를 드린 적이 있는 터라 가벼운 맘으로 안동이야기를 꺼냈다.
“내 어매가 안동에 계시고 동생들도 있지만 난 안동에 빚이 많아서 할말도 없고 부끄러운데…”
라며 달가워하지 않으신다. 안동에 대한 생각이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정체모를 빚 이야기에 잠깐 마음이 무거웠다.
안동을 홀대하고 걸음을 적게 한 것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랬다. 또 안동에서 나고 자랐으면 고향을 위해 뭔가를 해야 되는데 못하는 것이 빚이 아니냐고, 삶이 윤택하지 못해서 방귀만 뀌어도 뉘 집 방구인지 알 수 있는 좋은 향리인데도 그를 기억하는 모든 분들에게 도리를 못했다며 부끄러워한다. 순간 그 부끄러움이 고스란히 내게로 넘어온다. 고향 떠나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 뭔가 빚 갚음을 해야겠다는 맘을 먹어 본적이 없다. 그저 내게 주어진 삶, 안동을 고향으로 둔 이답게 예를 존중하며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는 것만으로 안동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고 자부했는데, 빚 갚음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바가 전혀 없었다. 말없이 한참을 있으니,
“이 땅을 살아가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향리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내 부끄러움을 눈치 채셨나 보다.
서가인으로서의 노력
율강(律岡) 김부경선생은 서예가다. 서력이 20년 정도로 길지 않지만 대한민국서예대전과 동아미술제 초대작가이며, 사임당, 율곡초대작가회 회장, 삼청시사(三淸詩社) 부회장등을 맡아 서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처음 붓을 잡은 계기가 단순히 처자식과 먹고 살기위해 업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서예계의 그의 위치로 볼 때 그가 그간에 쏟은 애정과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있었다. 서예학원 강사에서 서실을 개원하고 후학들을 지도하며 시작한 글씨쓰기가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이 못 되어 아예 서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주야로 글씨쓰기에 매달렸다. 그때 갈아입을 옷가지를 학원으로 가져다주며 무던히 뒷바라지를 해주던 부인에게 지금도 항상 미안하고 고마워하고 있다.
안동 화랑글방에서 잠시 붓을 잡은 적은 있지만 어려서 붓을 잡은 것도 아니고, 제도권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에 서가인으로서 늦었다는 죄의식으로 그는 훌륭한 선생을 찾아 나서기도 하며,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고문 공부를 하는 등 글씨를 잘 쓰기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쉬지 않았다.
지금도 삼청시사에서 한시작(漢詩作)을 공부하고 있다. 글씨쓰기가 단순히 붓에 먹칠해 흰 종이에 쓰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알고 글을 쓴 사람과 교감을 가지고 감정이입이 되어야 무생물인 문자에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다고 한다. 선현들의 시를 붓으로 옮겨 쓸 때 그 사람의 생각과 관점을 알고 그 맛을 느낄 때라야 리듬을 찾을 수 있고 글씨 쓰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어느 책에선가 ‘붓이 사람을 따라야지 사람이 붓에 휘둘리면 그것은 글씨가 아니라 어색한 그림에 불과하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글을 제대로 알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글씨를 제대로 쓰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들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펴 놓은 종이만큼 맘이 비워지고 비워진 만큼 채울 수 있으니 더 좋은 게 없지
그는 안동시 태화동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안동에서 생활했다. 대학진학에 실패한 후 전주에 있는 금산사로 재수하러 가면서부터 험난한 인생여정이 시작된 것 같다. 명목은 재수를 한다고 했지만 3남3녀의 장남인 그는 여러 가지 가정형편상 혼자만의 욕심을 채울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불가의 연을 맺어 사문생활도 몇 년 했었으나, 장남된 이의 임무를 저버릴 수 없어 환속한 후 결혼하고 서울에서 여러 가지 거듭된 실패를 경험하며 경제적인 모든 것을 잃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늦은 사회진출에 대한 조바심에 욕심을 내었던 것이 아마 실패의 한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그 인생의 밑바닥에 있을 때 영주가 고향인 지인이 학원 강사 자리를 안내해 주었고 1988년에 유천 이동익 선생을 만나면서부터 서예에 대한 근본을 배우게 된다.
서가인으로 입문하기 전까지 그의 외도의 길(본인의 표현)은 또 다른 아픈 과거로 연유한다. 둘째 남동생이 유년기에 안동36사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오랜 병원 생활 끝에 장애인의 몸으로 재활원에서 봉사생활을 하다가 또 다른 사고로 생을 달리하였다. 그때부터가 그의 방황의 시작인 듯싶다. 지금까지 운전을 하지 않는 것도 먼저 간 동생에 대한 아픔을 고스란히 맘속에 삭이며 나름대로 빚 갚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동에 발걸음이 뜸 한 것도 모두 그 아픔을 잊으려 함이 아닐는지.
“글씨를 쓰려고 펴 놓은 종이만큼 맘이 비워지고 비워진 만큼 채울 수 있으니 더 좋은 게 없지요.”
하던 말의 의미를 조금을 알 것 같았다.
안동사람,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
“이 세상엔 향내 나는 사람과 구린내 나는 사람이 있지요. 얻고자 하는 것이 늦고 양이 적어도 미덥고 향내 나는 삶을 살아야 돼요. 그러려면 남들이 향내를 맡아주기 보다는 구린내 나는 내 자신부터 정화시켜야만 우리 선현들처럼 뒤 오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거름이 될 수 있겠지요.”
그 뒤 오는 사람을 위해 그는 2년 전부터 작은 일을 하나 시작해 오고 있다. 그 표현이 겸손해서 작다고 하지만 기자가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었다. 중국의 서법이론을 정리 하고 체계화 하여, 쉽고 편하게 볼 수 있는 책을 만들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서실에서 공책에 수작업을 한 후 집에서 컴퓨터에 옮겨 쓰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백여 장이 넘는 공책에 옮겨 놓은 깨알 같은 글씨를 보고 힘드실 것 같다고 했더니,
“내가 안동 사람이니까 정신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지도 모르지요. 안동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벌써 그만 뒀지. 젊어서 후학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선사하는 것이 이 세상을 정화시키고 뒤 오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일이지요.”
고향 떠난 지 30년이 훌쩍 넘어 색이 바래고 물들어 질만도 하지만 철저히 안동 색 그대로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고향에 가족에 자기 자신에 대한 빚 갚음으로 뒤 오는 사람의 거름이 되기 위해 서예계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의지가 그의 삶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작품 하는 사진을 한 장 찍고 싶다고 했더니 주저 없이 노자 도경의 한 구절을 써 주었다. “和光同塵” -지혜의 빛을 드러내지 않고 세상과 동조 한다- 나름대로 빚 갚음을 위해 음덕을 쌓아 안동인의 향내를 드러내고 있는 그의 삶을 보는 듯 했다.
고향을 떠나 생활하면서 상대방이 내 고향을 알고 나서의 그 긴장됨과 조심스러움이란. 안동이 고향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그네들은 다시금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어딘가 모를 경건함으로 우리를 대한다. 내가 거기에 대해 불평했다.
“그 틀에 안주하면 되겠지요. 천착해서 내려다보면 그 얼마나 편하다꼬. 기자도 안동사람이야. 안동사람에게는 뿌리가 있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남들이 의식하고 있는 거니까.”
역시 우문현답이다. 언제 쯤 빚 갚음이 끝나 안동엘 자주 발걸음 할 건지 궁금해 하였다.
“언젠가 말술을 받아서 친구들과 같이 지나온 날과 남은 날을 이야기 할 때가 있겠지요. 지금은 안 봐도 본양이야. 서가인 으로서 앞일을 도모 한다면 낙향해서 뒤 오는 사람을 위해서 나눠주는 것이 내 일이지요.”
안동에서 개인전을 열면 자연스레 빚 갚음이 될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웃음으로 대신한다.
서도인의 길을 안내해준 영주가 고향인 지인이 점심을 먹자며 서실에 왔다. 우리의 얘기를 한참을 듣더니 한마디 거들었다.
“율강은 서단에 상당한 책임을 가지고 이끌어 가는 중진 작가님이세요. 공부에 임하는 자세가 변함없어 선비답고 시와 서를 알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정진하는 지존파로 안동을 빛낼 유능한 서예인 입니다.”
그분과 함께 봉화춘양이 고향인 주인의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으니, 그날 하루는 난 철저히 안동인이었다.
사람에 따라 일상적이고 평범하며 고요한 삶을 사는 이도 있고, 내가 만난 지극히 안동사람처럼 돌고 돌아 모진세파 다 겪은 후에 자신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도 있다. 어느 길을 들어섰건 간에 그 길을 최선을 다해 걷는 다면 그 삶은 아름답고 축복받을 것이다.
청량산 맑고 맑은 산골에 나날이 뜨는 해처럼 속 하얀 그의 삶을 닮고 싶어지는 하루였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