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장 송천댁 정경남 할머니(글/김선주)올 가을은 유난히도 짧은 것 같았다. 아침마다 이제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과 얼마 전 같은 따사한 가을날씨가 그립다. 장터의 가을도 풍성함으로 넉넉해 보였는데 시장에 나온 사람들, 어느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들 옷깃을 여미며 몸을 움츠린다. 한파가 왔다는 걸 실감한다.
주말이라 그런지, 구시장은 그나마 훈기가 감돌고 있었다. 사람들도 붐빈다. 점심때가 된 모양이다. 구시장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점심식사를 한다. 오뎅국물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데, 나도 덩달아 군침이 돈다.
날이 추우니, 훈기를 찾을 겸 그 따뜻함이 그리워 장터를 찾았다. 구시장 한 켠에는 낯이 익은 할머니가 보였다. 버스를 같이 타고 나오는 할머니라 그런지, 왠지 친숙하다. 모두들 여기 구시장에서는 송천할머니로 통한단다. 구시장에서도 좀 구석진 곳에 자리하신 그 송천할머니가 정경남 할머니(66)다. 거리에는 죽 할머니들이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시며, 찬거리를 팔고 계셨다. 좌판에는 은행이며, 호란초, 부식거리가 놓여져 있었다.
한 푼이라도 만져야 용돈도 하고 그러지
구시장 마트 앞 그 골목에서 좌판을 벌인 것이 십년 째라고 한다.
“한 10년 했지. 얼마 전 한동안은 여기 길 만드느라고 못 왔고, 옛날에는 경기가 괜찮았지. 그때는 요즘만큼 장사꾼도 별로 없었는데, 이제는 돈도 벌지도 못해. 놀다가 가는 거지 뭐.”
길안이 고향이라는 정경남 할머니는 48년 전 열아홉 나이에 송천동 하리로 시집을 왔단다. 슬하에 자식은 2남2녀를 뒀다. 자식들은 부산, 대구 등 다 나가서 일을 하고, 할머니는 혼자 집에 있으면서 소일거리로 구시장에 나와 몇 푼을 모은다고 했다. 10년 전에는 자식들 키우고 집에서 농사도 짓고 했는데, 이제는 농사도 다 남주고, 구시장에 나와서 찬거리를 파는 것이 전부란다.
“내가 놀 형편이 못돼. 한 푼이라도 만져야 용돈도 하고 그러지.”
할머니는 12년 전에 남편을 여의었다고 했다. 남편을 여의고 친정어머니를 10년 정도 모시고 살았는데, 3년 전에 돌아가셨단다. 큰언니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자기가 편했는지, 할머니 손에서 돌아가시고 싶었나보다고 했다.
요즘엔 뭐가 제일 재미있냐고 물었더니, 동네 하리에 친구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11명계를 만들었는데, 그곳에서 한달에 한번 놀러를 간단다. 최근에는 전라남도에 있는 보길도에도 다녀왔다고. 삶에 찌들지 않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할머니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고구마를 사러 온 아가씨, 뭐가 맛있냐며 묻는데, 할머니는 다 맛있다며 괜찮다고 한다.
할머니는 오래간만에 팔았다며 한숨이 늘어진다. 요즘 경기가 말이 아닌가보다. 이제 더 추워지기 전에 할머니 마음도 조금이나마 따뜻하기를 빌어본다.
없이 살아도 내 힘대로 해주면 좋잖아
할머니와 이야기 중에 옆 옷가게 주인 아저씨가 한마디 거든다.
“이 할머니가 여기 구시장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예요. 박스 같은거 폐품을 주워 모아서는 팔아다 없는 사람 도와줘요. 덕도 없는 일인데도 여름 한철엔 글쎄 땀을 뻘뻘 흘리면서 허리도 꼬부랑한데도 저 멀리서 폐품박스를 주워와서는…. 봉사정신이 아주 투철한 사람이예요. 송천댁이라면 알아줘.”
3, 4년 전부터 항상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폐품박스를 모아서 준다고 했다. 주위에서는 자기 몸도 편치 않으면서 그렇게 주워다 파는 정경남 할머니가 안쓰럽다고 말한다.
“내한테는 해도 덕도 없는 일이지뭐. 내가 그 사람들한테 박스를 준다고 해 될 것 없고, 내 힘대로 그렇게 해주면 좋잖아.”
지역경제의 한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따뜻한 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지 않은가. 할머니의 따뜻한 웃음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