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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뚝 난전에서 만물상하는 김삼진씨(글/계화순)

아름다운 계절 5월을 다 넘기고 장꾼을 찾아나선 날은 아침부터 햇살이 눈부신 6월의 둘째날이었다. 다른 장터의 생리는 전혀 모르고 시내에서만 30년을 넘게 살았고 마음이 바쁜 탓에 안동장터를 찾아 대문을 나선 시간은 7시 30분. 이른 아침부터 농삿일을 나서는 계절이라 장터도 제법 붐빌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어긋나 버렸다. 장꾼 두 세 사람이 전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 손님들이 보일 리 없다. 약간 두려운 마음으로 서문뚝에서 만물상을 열고 있는 김삼진씨를 찾아갔다. 다른 곳과는 달리 그의 가게에는 이미 서너 사람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는 농약통 수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물건을 사러 온 손님이 아니라는 걸 간파한 탓인가? 무덤덤한 시선으로 나를 맞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여서 장사한 지는 한 10년 되끼래요. 일년 365일 날매둥 있니더. (자네는 설도 안시고 추석도 안시나? 함께 있던 사람이 통을 주자 ) 360일은 나올끼시더. 아침 출근할 무렵 문열고 해지면 닫니더.
돈도 마이 못벌었는데 오래했다카먼 뭐 하니껴?
한 30년 되니더. 첨엔 책을 취급했지요. 아들 참고서는 취급 안하고 옛날책, 이바구책만 취급했니더. 강릉단오제, 경주 신라문화제, 영월 단종제, 삼척, 속초, 문화제 따라 마이도 돌아댕겼니더.

맨 첨엔 책장사를 하게 된 동기는 나이가 이만하이께네 늠사스러울 일도 없고 옛 그대로 얘기해드리지 뭐. 그께네 우리는 국민학교 1학년도 안댕겼거든요, 국민학교 입학식도 안했단 말시더. 일만 했지요. 고담 책장사를 하다 보마 다무 한자라도 배울 수 안 있겠나 싶어서 책장사를 오래도록 했어요. 국문도 몇자 배우고, 한문도 몇자 배았지요. 책을 팔다보이 '명심보감'이라

카마 밝을 명, 마음심, 보배보, 이래 네 글자를 알게되고 '한석봉 천자문' 그먼 여섯 글자를 알게 되쟎니껴.
한번은 영월 단종제를 갔는데 가마이 있으마 책이 팔리니껴? 그래가주고 여기저기서 뜯어모아다가 지어냈는기라요. '15세 어린임금 약을먹고 죽을라니 약이없어 못죽겠네, 칼로찔러 죽자해도 칼이없어 못죽겠네…(생략)'
곡조까지 붙여가며 구성지게 읊어댄다.

손으로 와룡 명잣에서 나오신 할아버지의 분무기를 수리하고 내말에 응답도 하고 자기 신명에 겨워 사설을 수없이 늘어놓았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가 잔솔질로 거들어준다. 내가
느끼기에 그는 완전 자유인이다. 오래 전 KBS TV의 '인간시대'에 출연을 했었고 요즈음도 모 방송사에서 녹을 하자는 섭외가 있단다.
그치만 내 안가니더. 녹음하만 저거는 좋지. 나는 여서 장사해가지고 하루에 한 5만원 벌어쓰면 되지

분무기를 고치는 중에 모자르는 부속품이 있었는지 차 옆에 세워 두었던 자전거를 타고 휑하니 사라지더니 5분여 지난 다음에 돌아왔다. 본드를 붙이고 한참이 지난 후 작동을 해 본 그는 조금전에 붙였던 고무밸브를 뜯어내고 얇은 고무밸브를 다시 붙이고 줄로 한참을 갈았다. 하는 일이 시간이 많이 들고 번거로웠던지,

"어른요, 인자 다 됐니더. 앞으로는 내 한테 갖고 오지 마소. 나중에 그냥 오시마 내 술한잔 받아들임시더."
"선생한테 안오문 누구한테 갖고 가노? 농사는 지어야제 돈은 없제."

한시간이 넘도록 분무기와 씨름한 모습을 지켜본 나로서는 의아심이 일었다.
"수리비 안 받으세요?"
"받아야지요"
"돈이 없다 그러시는데…"
"지금 없으마 다음에 갖다 주먼 되지요"
고쳐진 분무기를 자루에 넣으며 할아버지는
"이거 여다 좀 놔두시더. 내 볼일 보고 올게 얼매로?"
"부속값이 6천원 들었고, 여태까지 내가 만졌으께네 천원 주소"
차곡차곡 접어둔 만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고 할아버지는 모자를 고쳐 쓴다. 차에 걸어둔 조끼 주머니에 방금 받은 지폐를 그 역시 반듯하게 접어 넣는다. 며칠을 모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가늠하기에 만원권, 오천원권, 천원권, 20만원은 실히 됨 직하다.

분무기를 고치고 나와 대담을 나누는 사이에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께서는 본드를 가 사겼고, 또 한 할아버지는 뒷벽쪽에 펼쳐놓은 정말 몇 권되지 않는 책전으로 가서는 50쪽 남짓한 한오백년을 들고 물으신다.

"여∼사명당 사기도 있는가?"
"어른요, 다 있니더. 사명당 사기, 단종사기, 오만거 다 있니더"
"얼마이껴?"
"그거 사면 어른 오늘 술 한 잔 못 잡술낀데…, 오천원이시더"
할아버지는 두말도 않고 돈을 건네고 손님을 위해 마련한 자린지, 놀러오는 이들을 위해 준비한 자린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는 낡은 소파로 가 좌정을 한다
하얀 트럭과 파란 트럭 두 대에 걸쳐 벌려놓은 그의 가게에는 정말 별의별 물건이 다 있었다. 갖가지 연장, 동의보감 같이 표지가 낡은 책, 옛날 돈…

한 시경이 되어오는데 50대가 넘은 남자 어른만 들락거릴 뿐이어서 물었다.
"남자분들만 오시나봐요"
"아지매도, 할매도, 마카 다 오니더. 영양서도 오고, 청송, 봉화, 영주, 의성서도 오고…"
"전에 다니시며 장사할 때 맺은 인연으로 그렇게 멀리서들 오시나요?"
"그런 인연도 있지만 내가 테레비에도 몇 번 나왔고 물건 써 보이 틀림없으께네 오지요. 백프로 장담은 못해도 95프로는 장담하니더."

어느새 아저씨 한분이 와서는 톱을 갈아달라고 했다.
"물건을 팔기도 하고 고쳐주기도 하시는데 특별히 기술도 배우셨나요?"

"배우기는? 이래 보면 알지요. 딴데 갔다 온 연장은 보통으로 해주고 내 한테 오는 연장은 틀림없이 해 주니더. 다리 같으마 줄 하나로 톱을 열닷개 갈지만 나는 줄 하나로 톱 하나 갈아준
것도 천지라요."

무디었던 톱날이 날카로워지고 햇빛을 받은 톱날은 반짝반짝 윤이 난다.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 한분이 제법 큼직한 놋양푼이 하나와 숟가락을 두 개 들고 와서는
"아이고 허리야. 내 어디 좀 앉자. 이거 여서 샀는데 사소."
"나는 이런 거 판 적이 없는데요? 할머니 이거 팔아서 뭐 할라꼬요?"
"떡 사먹을라 카지"
잡다한 난전 한켠에 유기도 놓여 있다.
"유기도 취급하시는가 봅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유기를 취급하는 건 아이고요. 옛날 물건 갖고 오는 사람 있으마 사기도 하지만 광약 선전 할라꼬 이래 갖다 났니더."
"할매요. 이 양푼이는 도로 갖고 가소. 미나리도 무쳐 먹고…몸에 좋니더."
그러면서 별로 필요할 것 같지 않은 숟가락 2개를 받다들고 돈을 2천원 건네준다.
"할매 한 장은 숟가락 값이고요, 한 장은 이거 가다 빵 사 잡수소"

"이래 받아가가 될라"
톱을 갈아주면서도 할머니의 놋숟갈을 받아들면서도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우리 역사에 대해, 지명에 대해, 돈에 대해, 스스로 지어낸 사설시조를 끊임없이 풀어놓는다.

"그래 노래만 자꾸 부르면 뭐 하노?"
일찍이 그의 자동차 가게에 자리잡고 앉은 아저씨가 퉁을 주었지만 그는 들은 채도 않으며 손으로는 톱을 갈고, 입으로는 시조(혹은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다.

"일년에 350일에서 360일 정도는 여 나와 있니더. 한 10년동안. 이제 돈 잘 벌 때는 아니지만
그래도 장사의 신조는 머로하면 첫째, 남 먼저 자리를 피야 되고, 둘째는 자리를 비우면 안되요. 셋째는 남 늦게 싸는 게 되는 길이고, 장사는 부지런하면서도 게글바사야 되는 기래요. 남 쌀 때 어정어정 게그럼을 피우다 보마 마지막에 한 개 더 팔 수도 있는 기래요. 우리 장사 하는 걸 아이들 공부하는 걸로 치면 대학원 나오는 택은 된다 말이시더. 지금도 오일장에 나가 하루에 한 두시간만 팔마 십만원은 벌 자신이 있지만 안나가쟎니껴. 여 지키고 있쟎니껴. 옛날 실력 내 놓으마 다른 사람은 책 한권도 못 팔지만 나는 다 팔고 빈 보따리 들고 나서는기라요."

공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김상진씨. 지금 그의 나이 55세다. 글자를 깨우치기 우해 처음엔 책 장사를 시작했다는 그는 한글은 물론 웬만한 한문도 다 꿰고 있으며 우리 역사에 대해 참으로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남보다 더 많이 팔기 위해 홍보용으로 장사가 끝난 저녁 네 글자씩 맞추어가며 지어내기 시작한 사설들이 지금은 생각없이 척 보기만 해도 끝없이 지어낼 수가 있다고 한다. 요즘에도 강릉이나 영월에 문화제가 열릴 때면 찾아간다고 했다. 물론 전같이 활기는 느낄 수가 없지만 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옛것에 대한 향수가 나에게로 전해져왔다. 서문뚝에 10년 세월을 지킴이로 자리잡은 그의 트럭 난전에 가면 오만가지 물건과 옛날 돈 -심지어 이북의 돈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를 구경하고 구수한 입담에서 우러나온 사설들을 끊임없이 들을 수 있다. 전혀 지루함없이.<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