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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절터를 찾아서(글/나윤미)

한달 정도를 하는 일 없이 무료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기분 전환 삼아 문화모임 안동 답사를 따라 나섰다. 버스가 출발하자 답사코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처음 떠나는 불교 문화 답사여서 여러 가지 호기심이 마음 한 가득이다.
안동 인근에서 봤던 전탑과 달리 경기도 여주에서 보게 될 전탑은 어떤 모습으로 무슨 사연을 간직하고 우리네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까? 폐사지의 느낌은 어떠할까? 불교가 풍미했던 시기에 웅장했던 모습들을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을까?

대구와 춘천을 잇는 중앙고속도로가 작년 12월 중순 경북 풍기∼충북 제천구간(50.5㎞)을 마지막으로 완전 개통된 이후 처음으로 상행으로 중앙고속도를 타고 가는 것이다. 풍기∼제천 구간에 있는 국내에서 가장 긴 죽령터널(4.6㎞)과 충주호를 가로지르는 가장 높은 다리인 신단양대교(1백3m)등 중앙고속도로를 따르는 풍경들 또한 새롭다. 중앙고속도로를 한시간 조금 넘게 달려 여주에 도착했다.

신륵사 입구에 도착하니 사하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름난 절이 곧 관광지이기도 하니까 관광객을 상대로 영업중인 식당, 여관, 기념품점들이 즐비했다. 게다가 신륵사 앞을 돌아 흐르는 강에 유원지가 있어서 놀이배가 떠다니고 있다. 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마음이 답답하거나 미운 사람이 많을 때 절을 찾는다. 절 주변의 좋은 풍경도 감상하고 마음을 비우고 부처님의 자비를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관광지화 되어 버린 사하촌을 접할 때 마다 절을 찾는 마음가짐이 흐트러지고 이 동네 놀기 괜찮은 곳이네 하는 생각만 들곤한다.

고려말 최고의 선승으로 알려진 나옹화상이 입적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신륵사에는 보물 225호 다층석탑, 226호 다층전탑, 228호 보제존자 석종부도, 229호 보제존자 석종비, 230호 대장각기비, 231호 석등 등이 아직도 그 모습을 보존하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다층전탑은 신륵사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유유히 흐르는 강을 접하고 있어 풍경이 아름답다. 신륵사 경내 동남쪽의 절벽에 위치하고 있으며 벽돌의 반원모양의 배열이 무질서 했다. 이것은 후세의 무지하 수리로 인한 것으로 여겨졌다. 다층전탑 아래에 남한강이 굽어보이는 곳에 3층 석탑이 있고 그 옆에 강월헌이라는 정자가 남아 있어 지나는 이들의 한자락 쉼터가 되어주고 있었다.

신륵사 앞의 식당가에서 점심으로 매운탕을 먹고서 우리는 고달사지로 향했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산 기슭에 너른 절터가 보인다. 폐사지로 향하는 길을 걷는 일행의 발걸음이 느리게 느껴진다. 오후의 뜨거운 햇살 탓도 있겠지만 반겨주는 이 없는 황량한 터를 보며 발걸음을 옮기기 때문일 것이다.

고달사지 입구에 들어서는 길목에 거대한 둥치의 나무가 있어 옛 절터를 찾는 이들을 마중하고 있었다. 이 신목과 같은 큰 나무 앞으로 오르면 고만고만한 논밭들과 편편하고 너른 야산까지 이어진 고달사지가 나온다. 고달사의 기존 절터는 대부분 흙 속에 묻혀 있었다. 발굴조사로 파헤쳐진 흙더미 사이로 드러난 옛 절터에 남아있는 유물들의 규모는 고달사가 얼마나 대규모 사찰이었는가를 짐작케 했다. 고달사지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유물은 석불대좌이다. 불상은 어디 가고 거대한 대좌만 절터를 지키고 있었다. 이 석불대좌에 실내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다 한다. 지금은 이렇게 황량하게 변한 곳에서 구름과 바람과 햇살만을 한껏 안고 있었다.

이제 시선은 고달사지 맨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고달사지 부도로 향한다. 그 장중함에 그만 압도당하고 만다. 주위의 나무그늘에 앉아서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화려하고 섬세하다. 폐사지의 썰렁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고고하게 그렇게 산언저리에서 고달사지를 내려다 보고 있다. 엄청 멋지다. 이 부도 보다 먼저 보았던 원종대사 부도 앞에서 감탄했었던 것은 괜한 호들갑으로 여겨졌다. 원종대사 부도는 이 부도를 본떠 만든 것인데 장인의 솜씨와 공력이 이에 미치지 못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달사지를 들르고 차에 몸을 실어 닿은 곳은 목아박물관이다. 목아박물관을 관람하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해 일정이 늦어졌다. 일행 중 몇몇은 버스 안에서 초여름 오후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버스는 인가가 드문드문 있는 시골의 고불고불한 길을 가고 있다. 인가가 한 채 보이고 그 앞 밭 가운데 3층 석탑이 보이자 버스를 세웠다. 흥법사지에는 보물 제 463호 진공대사탑 귀부와 이수, 464호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흥법사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이는 것은 탑비 대신에 이수를 등에 지고 있는 돌거북이다. 원래 이 돌거북의 등에는 진공대사의 탑비가 얹혀 있었다. 3층 탑과 비 사이에 밭이 들어서 있고 발굴 조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보물로 지정된 지공대사 탑비 가운데 사지에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는 바로뒤에 나무가 자라고 있어 귀부가 비스듬하게 기울어 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우리 일행은 진공대사탑 귀부와 이수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수고스럽게 찾아 왔지만 잠시 머물다 다시 법천사지로 길을 향했다.

폐사지라서 이정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지 갈림길에서 차를 되돌리 길을 몇 번하고서 법천사지 입구에 도착했다. 흥법사지에 논과 밭이 들어서 있었던 것과 달리 법천사지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었고 곳곳에 발굴의 흔적도 보였다. 흥법사지의 황량한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어 이곳도 그저 그렇겠지 하는 마음으로 일행의 맨 끝에서 산기슭을 올랐다. 햇살이 뜨거웠지만 법천사지의 지광국사 현묘탑비가 있는 곳으로 오르는 길은 그늘져 있어 시원했다.

지광국사 현묘탑비를 보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지광국사현묘탑비는 검은색인데 그늘진 곳에 들어앉아 있어 그 색이 더욱 선명하고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세련되게 느껴졌다. 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 돌조각이 실제로 살아있는 듯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문의 내용은 지광국사가 수도한 내력과 행장(行狀)이 기술되어 있고, 비의 뒷면에는 탑비를 건립한 당시 종사한 승려의 인원수 및 건립내역을 기록되어 있다. 비신은 왼쪽 위에서 오른쪽 밑으로 사선의 ,균열이 있고 많은 손상을 입고 있어 시급한 보수, 보호대책이 필요하다. 지금껏 남아있는 글씨나 양측 면의 쌍룡은 천여년의 세월의 풍파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고 뚜렷하다. 좋은 돌을 고르고 공을 들여 조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정성과 노력이 느껴진다.

지광국사현묘탑이 원래 탑비의 우측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옮겨져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고 설명하셨다. 전하는 말로는 옮길 당시 매우 정묘하고 치밀하게 조각된 문양이 파손 될 염려가 있어 함께 이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늘진 곳이여서 해질녁의 어스름기가 더 빨리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산을 내려왔다.
신륵사와 목아박물관에서 볼거리도 많고 가기도 수월했지만 오히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법천사지에 한번 더 가보고 싶다. 탑비 양쪽의 비상하는 쌍룡이 여의주를 물고 날아가 버리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