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마음(글/김윤한)
8월 31일의 은행, 평일의 손님 이외에도 월말이라서 그런지 각종 월부금과 공과금을 내러 온 사람들로 대기실은 마치 시장판을 연상할 만큼 북적거렸다. 평소에는 구석에서 졸고 있을 청원경찰도 오늘은 은행 대기실 앞 뒤 쪽으로 왔다갔다했다.
매달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사람들의 심리란 원래 묘해서 월말에 은행에 가면 밀리는 손님 때문에 엄청난 짜증과 시간이 소요되지만 전기세나 수도세 같은 걸 일찍 내지 않고 굳이 월말에 와서야 밀리는 인파 틈에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가며 오랫동안 짜증스럽게 기다려서야 은행 볼일을 보곤 하는 것이다.
때문에 월말에 은행에서 중요한 돈을 송금하거나 출금하는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차례를 지킬 수밖에 없는 노릇이어서 장바구니를 든 채 노닥거리고 있는 아주머니들 틈에서 하루 종일 무료하게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은행을 전후좌우로 한 번 휘이 둘러보고는 창구로 가서 번호표를 뽑아 들었다. 264번이었다. 264란 숫자를 보고는 문득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하는 이육사의 시 광야가 떠올랐다. 하기사 육사 시인도 감옥에 있을 때 자신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필명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번호표를 보고 육사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는 육사의 얼굴도 그의 시와 함께 떠올랐다.
기다리는 사람들을 천천히 한 번 훑어보고는 창구에 켜져 있는 번호표 전광판을 돌아다보았다. 한 쪽 창구에는 183번 다른 한 쪽 창구에는 184번이라는 숫자가 붉은 빛을 하며 켜져 있었다. 계산해 보니 아직도 내 앞에 남은 대기자 수는 어림잡아 80명은 되니까 아직도 엄청난 시간을 기다려야 할 터였다.
대기 의자로 돌아오는 사이 또 한 사람의 용무가 끝났는지 띵똥 - 띵똥 하며 벨이 울렸다.
"185번 손님, 1번 창구로 오십시오."
군청색 넥타이를 곱게 맨 은행 여직원이 아주 상투적인 어투로 다음 손님을 호명했다. 그 아가씨는 나이는 벌써 한 서른은 된 것 같고 몸집도 제법 있어 보였다. 왠지 풍기는 분위기가 최소한 애기 하나쯤은 낳은 아줌마처럼 보였다.
벨 소리를 듣고 머리칼이 백발이 된 아줌마 하나가 창구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그 사이 은행 아가씨는 다시 벨을 울리며 "185번 손님, 안 계십니까? 186번 손님 창구로 오십시오."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뚱뚱한 몸집에 검은 색 바지, 흰 블라우스를 입은 50대쯤의 그 아주머니가 아마도 185번인 것 같았다. 그 아주머니는 당황해 하며 창구아가씨에게 급하게 통장을 내 밀었다. 창구 아가씨는 그 아주머니의 통장을 건네 받아서는 흡사 한 대의 로봇처럼 익숙한 손놀림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다지 크진 않지만 그래도 화물차를 서른 대나 가지고 있는 화물회사 경리과장을 오 년째 맡아오고 있지만 은행에 내가 손수 돈을 찾으러 오기는 처음이었다. 요즘은 대부분의 돈 거래를 온라인으로 처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설사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간다 해도 여직원 미스 최가 도맡아 놓고 하기 때문에 은행에 어느 쪽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던 내가 은행에서 장시간을 기다리기는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현찰 150만 원, 반드시 현찰이 필요하다는 사장님의 지시에 따라 은행에 보낼 사람을 찾았지만 미스 최는 내일까지 휴가를 받아서 서해안으로 놀러 가고 없고, 그렇다고 나이 환갑이 넘은 경비 아저씨를 보내기도 뭣해서 직접 은행에 오게 됐는데 오늘따라 하필 월말이라 엄청난 시간을 하릴없이 소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옆 좌석에서는 머리에 노란 물을 들인 아가씨 하나가 앉아서 여성잡지인 듯한 두터운 책을 펴 들고는 무슨 재미있는 기사가 있는지 혼자 이죽거렸다. 나이가 스무 살이나 될까말까 한 그 아가씨는 샛노란 머리칼에다 흡사 남자들의 스포츠머리처럼 머리칼을 짧게 하고 있었고 귀에는 엄지손가락 만한 귀고리를 치렁치렁 달고 있었다. 게다가 입술에는 거의 검은 색에 가까운 루즈를 짙게 칠하고 있었다.
"통장거래 없이 공과금만 납부하실 손님들께서는 좌측에 마련된 임시창구로 가셔서 공과금을 납부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피커에서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손님들 중 약 삼분의 일 가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르르 왼쪽 임시창구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렇게 라도 하니까 창구는 한결 조용해졌다. 공과금을 내러 임시창구로 몰려간 사람들의 빈 번호 때문에 창구 안내방송에서 연신 199번 손님! 200번 손님하며 빠르게 번호가 지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번호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사람이 서른 명은 더 되어 보였다.
임시창구로 몰려간 사람 때문에 대기실이 좀 조용한가 싶더니만 창구 오른쪽 구석에서 어떤 아이가 갑자기 자지러질 듯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의자 사이에서 뛰어 놀다가 넘어진 모양이었다.
아이와 마찬가지로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보아 그 아이의 어머니임에 틀림없는 서른 후반의 한 아주머니는 오히려 그 아이를 달래기는커녕 우는 아이 땜에 민망한지 안 그치나, 응 안 그치나.를 연발하며 오히려 아이를 더 때리고 있었다. 아이는 더욱 큰 소리를 내며 울어대고 있었다. 은행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들 그 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번호 대기 시간도 좀 남아있고 아이의 울음소리 때문에 하도 시끄러워서 잠시 은행 바깥으로 피신하려고 정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밖에는 올해의 마지막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앗 뜨거라 싶어서 얼른 다시 은행 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이 어떻게 됐는지 악을 쓰며 울던 아이의 울음도 어느새 멈춰져 있었다.
다시 조용하고 무료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흡사 번호대기 전광판처럼 붉은 불빛의 전자시계는 1초에 한 번씩 깜박거리는지 연신 깜박깜박 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세 시 십 분을 지나고 있었다.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며 대기실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린지도 벌써 한 시간 여나 지났다.
예전에는 은행 볼일을 보기 위해 모든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던 때도 있었다. 몇 시간을 기다려서야 단 몇 분 진료를 받고 나오는 병원에서처럼 단 몇 분의 볼일을 보기 위해 몇십 분씩 줄을 서서 기다리던 것에 비하면 좀 편해지기는 했지만 번호표를 들고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 또한 수십 년 뒤에는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은행 창구 뒤쪽에는 좀 높은 사람인 듯한 한 사내가 바깥쪽을 내다보며 앉아 있었다. 아마도 앞쪽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없는 듯 왼쪽 옆머리를 길게 길러서 앞쪽으로 해서 반대편 쪽까지 덮어놓았다. 그런데 그 올 수가 몇 되지 않아서 자세히 세면 머리카락 개수까지도 다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르기는 하지만 이렇게 바쁜 때에 앞쪽 창구의 여직원의 일을 조금이라도 거들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사내는 은행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투로 눈도 깜짝하지 않고 이 쪽을 노려보고 있는 듯 보였다.
일출봉에 해 뜨 거어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 거어든.……하는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가곡이 문득 생각이 났다. 하기는 그 노래하고 지금 무료하게 지겹게 기다리고 있는 상태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하도 기다림에 지쳐서 문득 그 노래를 떠올렸다. 기다려도 기이이다려도 니임 오지 않고…… 노랫가사를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아이구, 주연이 아빠 아닌교?"
그때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다. 쌍둥이엄마였다. 한 십 년 전에 우리 아파트 바로 아래층에 살았었는데 위에 딸을 하나 낳고 다시 아들을 낳으려다가 아들은 낳지 못하고 되레 딸 쌍둥이를 낳아 딸부잣집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 같으면 부끄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쌍둥이 엄마는 워낙 성격이 걸걸해서 자기 스스로를 일컬어 쌍둥이엄마라고 떠벌리고 다니기도 해서 결국은 별호가 쌍둥이 엄마가 되고 말았다.
"쌍둥이들도 벌써 많이 컸겠네요?"
"하모요. 벌써 중학교에 안 들어갔는교. 처자 다 됐심더 벌써."
쌍둥이 엄마는 예전이나 전혀 다름없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쌍둥이 엄마는 자꾸 무어라 이야기를 더 하려는 것 같았지만 별로 할 말도 없고 해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청구서 용지가 들어 있는 테이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신청서 용지가 들어있는 테이블은 아직도 예전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조그마한 볼펜 몇 개가 꼬불꼬불한 플라스틱 줄에 매달려 있고 유리판 위에는 인주 몇 통이 견고하게 부착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볼펜이나 인주를 누군가 자주 훔쳐 가는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볼펜에다 꼬불꼬불한 줄을 매달아 놓는 건 결국 고객들을 의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좀 유쾌한 풍경은 아닌 듯 보였다. 오히려 볼펜에다 은행 로고를 새겨 놓고 고객들이 필요하면 가져갈 수 있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좌번호 12345-6789-001, 비밀번호 9876, 금 일백오십만원정, 고객성명 황병길 청구서 용지에다 차례차례 내용을 써넣고는 작년에 새로 새긴 굵은 크기의 인감도장을 꾸욱 눌렀다. 그리고는 혹시 잘못 써넣은 것이 없는지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통장에다 청구서 용지를 끼워 들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세 시 반, 번호대기 전광판의 번호는 각각 260번과 261번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흡사 면접시험 때 차례를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번호가 얼른 지나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옆 창구 전광판에 263번 불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다음 번에는 이쪽 창구에 대망의 264번 불이 들어오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앞의 262번 손님은 무슨 볼일이 그렇게 많은지 창구 여직원을 붙잡고 삼사 분이 지나도록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이 오히려 바로 옆 창구에서 264번 불이 들어왔다.
"264번 손님, 2번 창구로 오십시오."
안경에다 빼빼 마른 그 창구 아가씨가 예의 상습적인 어투로 호출을 했다. 나는 순서가 바뀔 새라 급하게 2번 창구로 쫓아가 통장과 청구서를 가지런히 펴서 내밀었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장장 한 시간 반을 기다려서 이제야 은행 일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통장을 건네 받은 창구 여직원은 나를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그 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온 은행 안에 울려 퍼졌다.
"죄송합니다. 손님, 이거는 다른 은행 통장인데요."<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