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대 같았던 아버지의 사랑(글/김명숙).jpg)
높다란 가지는 곧잘 바람에 소리를 내고 / 빽빽한 잎새에 때로는 꽃처럼 눈이 쌓이네 어젯밤엔 달님이 한껏 멋을 부려 / 비단창문에 그림자 비치며 지나가셨더라네
-진여의 '대나무'-
부처님 전에는 얼굴도 디밀지 않는 채 한참을 달빛 속에 서성댔다. 겨울이 빠르게 오고 있었다. 암자 앞에서 엇비슷하게 쳐다본 하늘, 그곳에 온달이 떠 있었다. 밑둥이 제법 큰 나무들이 달빛을 업고 있어 수많은 잔가지들이 마치 달의 실핏줄 같았다. 일긋한 돌탑. 깨어진 기왓장 무데기. 바람과 함께 우는 풍경, 달빛에 푸욱 안겨있는 대밭. 잔가지들이 소스락 대는 소리, 귀 기울이면 고요속에서 끊임없이 뭔가 살아서 움직이는 밤의 소리들이 들렸다.
그때 바람이 나무들을 두들기며 산을 깨우고 대숲을 흔들었다. 대나무 그림자가 재바르게 숲을 지나가며 숨을 토했다. 그 소리는 속울음을 참다가는 끝내 터져 나오고만 울음소리와 흡사했다. 그리고 달도 대숲도 나도 다시 고요속에 몸을 묻고,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가끔씩 들리는 곳이 었는데 그 날은 유독 별천지에 온 것처럼 나를 휘황하게 했다.
<<<나는 애물단지 딸이었다>>>
나는 얼마 전 낯이 선 이 동네로 살림을 옮겼다. 이삿짐을 나르던 일꾼이 그랬다. "진짜로는 저런 집에 살고 싶으시지요." 그는 뒤란이 온통 대밭인 큰 기왓집을 가리켰다. 아마 내 살림살이에 구식물건이 더 많은 걸 보고 짐짓 그렇게 생각했나보다. 나는 대답으로 웃었다. 조각천을 꿰매나가다 어깨가 묵직해 쉴 때, 동쪽으로 난 쪽문을 열면 기와지붕도 보이고 대밭도 그곳에 있다. 그 기와집과 대밭은 내가 시집올 때까지 살았던 마당이 넓은 친정집과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다.
아버지는 성품이 대쪽같아 공직생활 하실 때 어려움이 많으셨다. 한번은 보직도 다 치우고, 촌스런 꽃무늬 나일론 이불보따리를 싸들고 임지인 산간오지로 가셨던 적도 있었다. 어린 내 마음에도 떠나시는 아버지의 뒷보습이 어찌나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시든지 어른이 된 지금에 와서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또 시집간 딸이 사고로 다쳐 몇 달을 꼼짝도 못한 채 누워 있을 때 아버지는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병실에 오셨다.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때 아버지의 손에서는 댓잎이 몸 비비는 그런 소리가 났다.
나는 애물단지 딸이었다. 아버지는 겉으로 드러나게 정을 내시지는 않는다. 휘어지지 못하고 그대로 쫙 쪼개져 버리는 대같이 꼬장꼬장한 내 성격도 아버지 못잖아 어른들을 힘들게 했다. 사십을 한참이나 지나서야 아버지 사랑도 늘 푸른대 같았음을 알아채다니. 이제는 나도 가끔씩은 못 이기는 척 구부러지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여태, 팔순이 눈앞인 아버지의 가슴에 박혀 있을 대못을 뽑지 못하고 있다.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되 먼지가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뚫되 물에는 흔적이 없다.
옛 고승의 말이다. 살아가면서 이렇듯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다면 뭘 더 바라겠는가.[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