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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시름 잊고 봉사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을유생 김화자씨(글/이미홍)

만나는 장소가 절이라는 말에 조금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대원사로 향했다. 우리가 만나러 가는 을유생 해방둥이 김화자(61)씨. 초파일 준비를 돕느라 요즘은 남는 시간에는 대원사에 꼭 들르니까 거기에서 만나는 게 좋겠다고 했던 것이다. 초파일 준비로 한창 떠들썩할 줄 알았던 사무실은 그새 준비가 얼추 끝난 모양으로 대부분의 신도들이 돌아가고 조용했다. 초파일에 달 분홍빛 연등들이 그득한 곳에서 여성스러운 까만 상의와 까만 바지 차림으로 여성회관에서 스포츠댄스 강좌를 듣고 왔다며 김화자씨가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강단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다.

다들 어려웠던 그 시절
“우리 크던 시절 그때 사람들치고 어렵게 크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요? 다들 어려웠지요. 그런데 IMF 뒤로 요즘이 꼭 옛날 그때 같애요. 사람들 사는 게 어려운 게 꼭 그래요.”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하는 우리에게 화자씨가 제일 처음 꺼낸 말이다. 그리고는 별다를 게 없는 이야기라며 살아온 이야기를 덤덤히 풀어내린다.
“친정이 안정면인데 그때는 영풍군 안정면이었어요. 면에 초등학교가 있어서 형제들 모두 거기엘 다녔지요. 제가 육남매의 다섯째였는데 우리 어무이, 아버지가 촌에서 농사를 지으시면서도 우리 육남매를 다 학교를 시키셨어요. 없는 살림에도 공부는 해야 된다 하면서요. 육남매나 되다 보니까 입성이고 뭐고 일일이 다 챙겨줄 수가 없어서 가방도 없이 대충 둘둘 둘러맨 책보에 도시락도 못 싸가고 신발도 변변한 게 없어서 맨발로 학교를 다니다시피 했지요. 우둘투둘 자갈이 많던 5리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서 다녔어요. 그런데도 저는 학교 가는 게 너무 좋아서 결석 한 번을 안했는데, 그런데 중학교에 올라가고 얼마 안 되어서 오빠들 때문에 집안 형편이 안 좋아져서 그만 학교를 더 못했어요. 어릴 때부터 총기도 있었고 공부하는 게 정말 좋았었는데 학교 그만둘 때 펑펑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다가 스물 셋에 안동으로 시집을 왔어요. 우리 때 치고는 늦은 나이였지요. 오니까 아무 것도 없대요. 월세 방 한 칸 얻어서 살림을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고생이야 말로 다 못하죠. 여기저기 이사도 많이 다니고 이일 저일 안 해본 게 없어요. 그래도 사는 게 나만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하고 살았었는데, 저도 IMF 전후해서부터 사는 게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아들이 오토바이 사고가 났는데, 합의금 물어주고 치료하고 하느라 진 빚을 채 다 갚기도 전에 삼년 간격으로 이번에는 애들 아버지가 또 오토바이 사고가 났어요. 그래 또 보상금 물어주고 연달아 그러다 보니까 빚을 몇 천 만원을 졌어요. 그때부터 많이 힘들었지요.”

남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의 시작
너나 할 것 없이 힘든 세월이었다지만 힘든 시절일수록 여자들이 살아내야 하는 세상은 매냥 더 힘든 법이었다.
“제가 딸, 아들 남매를 뒀는데 둘째인 우리 아들 놓을 때가 박대통령 시대였는데 그때 나라에서 가족계획을 하라고 한참 떠들었죠. 박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그럴 때였어요. 그러면 애들 대학까지 시켜 준다고 그랬죠. 나는 그래서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사는 게 어려우니까 둘만 놓고 그만 낳아야겠다 싶어 더 안 낳은 거래요. 그전 우리 아들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저는 둘만 놓을 생각이었거든요. 지금 우리 동갑 친구들끼리 하는 계가 있는데 그중에서 자식이 둘 밖에 없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다들 삼남매, 사남매, 오남매, 이렇죠. 저는 옛날부터 생각이 그랬어요. 형편에 맞게 내가 시킬 수 있는 만큼만 낳자 하고요.”
그 시대에 가족계획이란 걸 화자씨 스스로 알아서 한 셈이다. 사는 게 어려우니까 그랬다는 게 화자씨의 설명이다. 그치만 다들 사는 게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도 집집마다 생기는대로 아이들을 낳던 시절에 그런 생각을 하고 그걸 실천했다는 건 화자씨가 나름대로 주관이 있는 깨인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화자씨의 감춰진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화자씨가 새로 이사를 간 동네인 당시 명륜동의 김정한 동장님이셨다.
“그때 우리 둘째 애가 두 살인가 세 살일 때였는데 하루는 동장님이 오시더니 동네 주민명부를 던져주면서 다짜고짜 저보고 반장을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남편이 어린 애를 데리고 무슨 동네 일을 보느냐며 하지 말라고 해요. 그래 아를 업고 동사무소를 찾아가서 ‘동장님 저는 못하겠어요.’ 했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동장님이 장부를 던지면서 일할 만한 사람이 안한다고 하면 누가 하느냐고 막 소리를 지르시는 거래요. 그래 제가 무서워서 엉겁결에 ‘알았습니다’ 하고 장부를 들고 돌아왔어요.”
그렇게 반장 일을 보게 된 게 지금 생각하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의 시작이었던 셈이라고. 그러다가 나중에 그 동장님이 ‘김화자씨 새마을 일도 맡아서 한번 해 보소’ 하면서 이번에는 화자씨를 새마을지도자에 추천을 했다. 그때 지금 서른 둘, 난 아들 애가 초등학교 2학년인가 할 때였는데 애들 남매를 두고 안동소주 만드는 조옥화씨하고 둘이 서울로 일주일간 새마을 교육을 갔다 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77년도부터 명륜동 새마을지도자를 하면서 동장님하고 사무장님 따라 다니면서 새마을 운동 지도도 하고 어려운 사람들도 도와주고 그러면서 화자씨가 조금씩 봉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 셈이다. 그러다가 여성회관이 생기면서부터 여성회관에서 자원봉사 일을 맡게 되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두 번의 사고, IMF
“고생은 좀 했지만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 이제는 형편이 좀 필까 하는데 그만 안 좋은 일이 닥치더라고요.”
몇 년 전에 시청에서 집 옆으로 길을 돋우는 공사를 하는 바람에 길에 바로 붙어있던 화자씨 네 집이 돋운 길에 막혀 폭 빠지게 되어버린 일이 시작이었다. 게다가 공사 후로 담장 옆에 붙은 화장실 사용이 불편해졌다는 걸 알고 시청에 계시던 잘 아는 계장님이 화자씨가 없는 사이에 와서 화장실을 부수고 다시 돋우는 공사를 해줬다. 그런데 도와준다고 한 그 일이 화자씨에게는 오히려 한으로 남게 되어버렸다. 옛날부터 화장실은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화자씨는 그걸 믿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계장님이 화장실 공사를 해 준다고 하는 걸 거절을 했던 거였는데…, 오비이락이었을까? 얼마 뒤 아들의 오토바이 사고가 난 것이었다. 그리고 삼 년 만에 다시 남편의 오토바이 사고까지. 그런데 두 번 다 이상하게도 가만히 집에 있는 사람을 친구가 불러내어 나갔다가 크게 다쳐 들어온 것이었다. 그것도 상대방 사람까지 다치는 큰 사고였다. 화자씨 맘에는 괜시리 화장실을 건드려서 그런 것만 같았다.

마음과 마음은 통하기 마련
“두 번 사고 나고 그것 때문에 우리 아저씨 직장 떨어지고 거기다 IMF까지 터졌으니 그렇잖아도 우리 같은 사람이 살기에는 참 어려웠지요. 그래도 어째요. 그렇다고 신세 한탄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제가 원래 무져 놓고는 못살아도 즐겁게는 살아야한다는 생각이거든요. 제가 이래 보여도 별별 노가다를 다 해요. 전에는 식당일도 많이 다녔는데 IMF이후로는 젊은 여자들도 일하러 많이 나오니까 나이 많은 우리한테까지 식당일이 안 돌아와요. 이제는 젊은 세대 중에서도 살기가 힘드니까 일하려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래 저는 요즘은 봄가을에는 농사일 하러 다녀요. 사과 적과도 하고 고추도 따고 약초밭도 매고 철철이 같이 일 다니는 사람들하고 짝을 지어서 일을 하러 다녀요. 처음에는 저보고 이런 일 잘 못하게 생겼다고 그러면서 주인들이 미심쩍어 하는데요. 하루 일 하는 거 보고는 모두들 다음에 또 일 와 달라고 그래요. 저는 처음 적과할 때도 가지 안 다치려고 제 딴에는 엄청 신경을 쓰면서 했어요. 후딱후딱 해치우는 것도 좋지만 나무가 상하면 안 되잖아요. 근데 주인이 그걸 알더라고요. 저는 내 일 남의 일 다르게 안하거든요. 남의 일도 똑같이 정성들여 하다보면 일하는 게 즐거워요.”
사람 맘이 다 거기서 거긴가 보다. 그래서 마음으로 하는 일은 통하게 마련이가 보다.
“우리 아저씨 직장 그만두고 연금이라도 타서 생활하려고 국민연금공단을 찾아갔더니 그때 아직은 연금을 못타고 몇 년 있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사정을 알고 그때 국민연금공단에 계시던 담당 직원분이 연금대부를 내 주시더라고요. 그때 우리가 자격이 안됐는데도 그분이 책임을 지고 대부를 내도록 해주셨어요. 더 내주시마 했는데 제가 갚을 걸 생각해서 오백만원만 냈어요. 그때 제일 급했던 게 아들 등록금이었는데 그걸로 아들 대학 등록금 내고 빚 갚고 그랬지요. 그때 그분이 참 고맙더라고요. 그래 나중에 찾아갔더니 멀리 문경으로 전근을 가셨다고 그러대요. 그래 인사도 제대로 못했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참 고마워요. 제가 살아보니까 사는 게 힘은 들어도 그래도 좋은 분들이 참 많아요. 그분들 덕에 또 어려운 고비 넘기고 그러면서 살아나왔지요.”
큰 힘이던 작은 힘이던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사람들을 화자씨는 잊지 않는다. 비록 작은 도움이나마 그 마음이 화자씨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씨는 봉사활동을 빠지지 않고 계속한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힘이 된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제가 여기 대원사를 다닌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사실은 중간에 한동안 안나오다가 요즘 다시 다니는 거예요. 집에 힘든 일이 그렇게 연거푸 터지고 먹고 사느라 힘들기도 했지만 신경을 너무 쓰다 보니까 나중에는 몸이 못 견디더라고요. 사람이 좀 멍해진다고 하나, 그렇게 한차례 아프고 나서는 생각하고 다르게 쓰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마음먹은 대로 안 될 때가 있어요. 머리로는 내가 틀린 걸 아는데도 맘처럼 잘 안되는 거래요. 그래도 여기도 다시 다니면서 주지 스님한테 좋은 말씀도 듣고 이렇게 일이 있으면 나와서 돕기도 하고 그러니까 아픈 것도 낫는 것 같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또 힘을 얻고 그래요.”

봉사와 일과 길에서 얻는 즐거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전화벨이 울린다. 통화하는 양을 보니 아들에게서 온 전화인 듯하다. 절 문 밖에 와 있었던 모양으로 화자씨가 ‘잠시 밖에 나갔다 오마’하고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 아들 앞에서는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때로는 그 아픔까지 대신하고픈 화자씨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아 아들을 보내고 들어와서도 “우리 아들이 올해 서른 둘인데 아직 결혼을 안했어요.” 하는 말 말고는 가타부타 더 말이 없는 화자씨에게 아무 것도 묻지를 못했다. 오토바이 사고 이후 몸 고생 마음고생이 심해 안쓰럽기만 한 아들이라 신경이 더 쓰이는 모양이다.
생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막 생의 환희를 깨닫고 웃음 짓는 바로 그 순간 코앞에 불행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생이 불친절하기는 해도 결코 불공평하지는 않기에 우리는 또 살아갈 의미를 가지게 된다. 화자씨에게도 생은 그랬다. 화자씨가 한창 봉사의 재미에 빠져 정말로 사는 게 신나고 즐겁다는 걸 느낄 때 그런 사고가 났던 것이다.
“그러고부터 사는 게 팍팍했지요. 그래도 여성회관이 있어서 제가 이래 웃으며 살아올 수 있었어요. 만약 봉사가 없었다면 지금 제 생활이 조용했겠지요. 요즘도 여성회관 때문에 저가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요. 여성회관에서 하는 스포츠댄스 강좌도 듣고, 봉사도 할 겸 일주일에 세 번은 여성회관에 가고, 일주일에 한 번은 시청에 민원 봉사 나가고, 한 달에 한 번은 노하동에 있는 우리집에 봉사도 가고요. 그리고 여기 대원사 절에도 오며가며 거의 매일 들려요. 거들 일 있으면 거들고 없으면 없는 대로 불공도 드리고요. 그리고 먹고 살아야 되니까 돈도 벌어야잖아요? 그래 늘 이 일 저 일 하는데 요즘은 오전에 건물 청소 하는 일을 해요. 직원들 출근하기 전에 일찍 깨끗하게 청소를 해 놓아야 되니까요. 깨끗하게 청소해 놓고 나면 저도 기분이 좋아져요. 보통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신안동 집에서 시내까지 걸어서 와요.”
특별히 바쁜 일이 있는 날을 빼고는 사시사철 걸어 다닌다는 화자씨.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 다녀서 이제 웬만한 거리는 먼 줄도 모르고 걸어 다닌다고. 5분도 안되는 거리도 차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된다는 화자씨다. 차비도 아끼고 건강에도 좋고 생각할 여유도 생기고 아무튼 걷는 건 여러모로 좋은 일이란다. 걷다 보면 차타고 다닐 때는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고 아는 사람들도 만나고, 멋있게 포장할 줄은 몰라도 걷고 또 걷는 그 길에서 얻는 생의 즐거움을 아마도 화자씨는 알고 있는 듯했다.

동기들과 총동창회
“우리 동기들 사는 거요? 다들 잘 살지요. 내만 못 살지 다 잘 살지요. 옛날 이웃 간에 알아서 모아서 계를 했는데, 거기에다 동갑내기들이 모여 같이 계를 하게 된 거래요. 동갑이라는 것 하나로 금방 친구가 된 거죠. 옛날 얘기는 잘 안 해요. 옛날 못살던 이야기는 뭐 할라꼬 자꾸 해요. 가끔 옛날 추억 생각나면 더러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다들 어렵게 살았던 과거 이야기 누가 자꾸 하는 거 좋아하나요? 그것보다는 자식 이야기 요새 사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하지요.”
그럴지도 모르겠다. 해방이 되던 해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터졌던 육이오 전쟁과 그로 인한 동기간의 이별과 피난생활과 오랜 가난으로 얼룩졌던 지난날들을 그 어느 세대보다 고스란히 겪었던 화자씨와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더구나 어쩌다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화자씨도 그렇거니와 너나 할 것 없이 딸로 태어난 죄로 오래비나 남동생에 밀려 초등학교 문턱만 넘어도 감지덕지해야 했던 건 물론이려니와 그 잘난 오라비나 남동생이 학교를 다 마칠 수 있도록 공장으로 식모로 다니며 뒷바라지를 하다가 시집을 갔고, 시집가서는 또 시집대로 층층시하 시부모님 수발에 줄줄이 딸린 시동생, 시누이들 뒷바라지에 한 시절을 다 보낸 세대이고 보면 그 지긋지긋한 세월을 되씹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들겠는가 말이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이 살았어야지요.’ 하면서 어렵게 살던 이야기를 하는 걸 꺼리면서도 한편으론 도시락도 없고 책가방도 없던 그 시절이 가장 그립다는 건 어쩌면 아무 것도 모르고 부모님 품안에서 살던 그 유년의 포근했던 느낌들이 그립다는 말이 아닐지.
“동창회는 초등학교 동창회가 좋지요. 안정초등학교 총동창회를 방학에 학교에서 하는데, 원래 안정초등학교에 총동창회가 없었는데 우리 동기들이 중심이 돼서 총동창회를 만들었어요. 반별로, 기별로 동창회는 따로 있었지만 총동창회가 없었는데 그러다가 총동창회가 정식으로 발족되니까 학교에 계신 선생님들도 얼마나 좋아한다고요.”
그것도 알고 보니 화자씨가 자기들끼리 부부모임을 하고 있던 동기 남학생들을 설득해서 그 좋은 걸 너들끼리만 하냐고, 그럴 게 아니라 나도 우리 동기 모두 아니 모든 동창들이 다 모이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정식으로 총동창회를 해서 다 같이 만나자고 거듭 설득 반 부탁 반 해서 만들게 된 동창회였다. 어디서든 나서서 팔 걷어 부치고 일을 시작하는 화자씨의 입김(?)이 여기에도 알게 모르게 작용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무엇이든 좋은 일은 나누고 함께 해야 된다고 믿는 화자씨다.

봉사는 자신과의 약속
“봉사라는 게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거든요. 시간나면 하고 아니면 빠지고 그런 마음으로는 안 해요. 미리 약속을 했는데 피치 못할 일이 생기면 미리 전화하고 대신할 사람을 꼭 부탁해 놓고 그러지 내가 약속 못 지켜서 남한테 피해주는 일은 절대 없어요. 한번은 시청에 봉사 나가는 날인데 갑자기 복통이 와서 죽을 만치 아프더라고요. 그래 아픈 배를 잡고 병원을 가면서 그날 같이 봉사하는 짝궁한테 전화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도 일이 있어 다른 사람과 번을 바꾼 바람에 연락이 제대로 안 된 거예요. 그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화자씨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안온다고 대신 나온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며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걱정을 한거예요. 그래 병원에서 급한 치료만 마치고 택시가 안 잡혀서 아픈 배를 잡고 시청까지 뛰어서 갔어요. 내가 한 약속이고 내 책임인데 내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보면 그건 안 되잖아요. 나는 평생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살았어요. 단지 하나 돈이 없다는 거 하나예요. 그런데 나는 없어도 남한테 주고 싶어요. 주면서 살고 싶어요.”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그 말을 한결같이 실천하고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화자씨가 가진 것 없이도 왜 그렇게 당당하고 즐겁게 살수 있는지 알 것도 같다. 그건 자신의 원칙을 지키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가지는 자신감에서 오는 당당함이 아닐까.

노력 봉사, 마음 봉사, 양심 봉사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 하는 걸 알아요. 사람이 돈을 벌어 내 혼자 잘 먹고 잘 입고 산다고 해도 남은 거 그거 다 안 가져가거든요. 내가 힘이 돼 가지고 없는 사람하고 그거 다 나눠 먹고 사는 거 그게 내 꿈이예요. 이제 자식들도 다 컸으니까 주위에 부모없이 고생하는 불쌍한 아이 하나 정도는 거둬주면서 살고 싶어요. 등록금도 대주고 옷도 사 입히고 반찬도 해주고 그렇게 내 식구처럼 하면서 살고 싶은데, 빚을 다 못 갚아서 아직은 그걸 못하고 있어요. 형편이 조금만 더 좋아지면 꼭 그렇게 할 생각이예요. 내가 조금 덜 먹으면 되거든요. 내 먹고 남는 거는 나누는 거 그게 사람 사는 이치 아니겠어요? 이태껏 어렵게 살아왔어도 나는 내보다 많고 있는 사람 부럽지 않아요. 지금 내가 봉사하러 다니는 거는 돈 없어도 할 수 있는 게 그거니까, 내가 하는 건 노력 봉사, 마음 봉사, 양심 봉사니까요.”
채무를 안고 경제적으로 늘 쪼들리는 삶을 살아내는 일이란 사실 얼마나 갑갑한 일인가. 돈 때문에 간혹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하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식구들 간에 얼굴 붉히고 짜증내고 찡그리며 살아내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다가 끝내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화자씨는 그런 속에서도 신나고 활기차게 산다. 그 와중에도 남을 위한 봉사를 일상으로 알며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산다. 그러고 돌아오는 길에서 삶이 주는 기쁨과 축복을 깨닫고 살아갈 힘을 다시 얻곤 한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화자씨가 하는 봉사는 분명 많이 배운 사람이 하는 봉사와도 다르고 돈 있고 뜻있는 사람들이 하는 봉사와도 다르다. 그저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하는, 화자씨 말마따나 단순한 막노동 봉사일 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없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내가 가진 걸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하는 화자씨의 진짜배기 마음이 있다.

이제 곧 적과하는 시기가 다 돼 간다고 좀 있으면 과수원으로 적과하러 다녀야 해서 아무래도 봉사활동에 조금은 빠져야 할 것 같다고 미리 미안해하는 화자씨 얼굴 뒤로 창 너머 봄 햇살이 따스하게 비쳐든다. 이 봄 만개한 사과 꽃이 질 즈음이면 화자씨는 챙 넓은 모자에 얼굴에 그늘을 드리워줄 수건 하나 두르고 사과나무 위에서 너무 많이 달려 처치곤란인 어린 사과들을 솎아내는 일을 할 것이다. 이 봄도 운전을 하며 지나치는 길가 어디쯤에서 우리는 사과나무에 매달린 머릿수건 쓴 아주머니들을 만날 것이다. 그러면 오늘부터는 그 아주머니 한 분 한 분이 혹 우리의 그 화자씨가 아닐까 하고 한번쯤 고개 돌려 돌아보고 가기를 바란다. 그 길 끝에서 화자씨의 또 다른 얼굴인 우리 어머니를 만나러 가도 좋을 것이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