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암정사 파수꾼 류영우씨(글/서동석)
4월 둘째 주말인데도 아직 꽃이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뉴스에서는 꽃도 피지 않았는데 벚꽃축제를 한다고 나무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이 글이 여러분 독자들 손에 들어가게 될 때면 노란 산수유도 벌써 지고 있을 겁니다. 낙동강변의 벚꽃도 봄바람에 속절없이 흩어져 버리고 없을 테지요. 참꽃도 남아 있을지 궁금하군요. 그래도 다시 다른 꽃들이 핍니다.
인생도 피고 지는 꽃과 다름이 없네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서 온갖 희망과 포부로 가득 찬 질풍노도의 시간을 지내고 나면, 지나온 걸음을 돌아보는 때가 오게 마련입니다. 내가 언제 꽃을 피운 적이 있었던가. 내 꽃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리고는 다시 한번 꽃 피울 수 있을까 희망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는 비가 조금밖에 안 왔었는데 이번에는 이틀에 걸쳐 꽤 내립니다. 이제 더 많은 생명들이 생겨나겠지요. 서서히 그쳐가는 비와 같이 풍천면 광덕에 있는 겸암정사(謙庵精舍)를 찾아 갑니다. 하회마을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부용대 절벽 왼편으로 집이 한 채 보입니다. 조선 중기를 살았던 겸암 류운룡(謙菴 柳雲龍, 1539-1601)의 공부방과 살림채가 바로 겸암정사입니다. 이곳에는 7년여 전부터 류영우(68)씨와 부인 정계순(63)씨 내외분이 기거를 하고 계십니다. 상주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시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안분자족하고 계시지요. 말하자면 명예와 물욕에서 벗어나 인생의 꽃을 다시 피우고 계시다는 겁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겸암정 누마루에 앉아서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이제 여러분께 들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겸암정사의 새 주인이 되다
1998년 여름에 겸암정사는 새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안동농고에서 7년간 교직에 있다가 상주대학교로 옮겨 34년을 교육활동에 전념하셨던 농학박사 류영우씨 내외분이 그들입니다. 처음 와서 보니 마당은 쑥대밭이고, 주위에 철조망이 쳐져 있고, 대문은 출입을 못하도록 나무를 대고 못질을 단단히 해 놓았더라고 합니다. 폐허가 다 된 이곳에는 뱀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 동안 간간이 사람이 거주를 하긴 했으나 초등학교 4학년 때 고향을 떠난 뒤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겸암정사 살림살이의 형편없음은 말 할 필요가 없었을 테지요.
이런 폐허에 왜 오시려고 했을까요. 살면서 조상의 음덕을 많이 입었다고 합니다. “직장을 잡으면서, 교직에 있으면서 12대조 겸암 할배의 음덕을 많이 입었습니다. 누군가 고향이 어디오? 물으면 하회라고, 할배가 누구냐고 물으면 겸암 어른이라고 하면 훌륭한 조상을 두었다고 칭찬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후손 된 도리로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지난 시절 조상의 음덕에 보답하려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생활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누리는 주거생활문화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살기 좋게 단장이 된 곳이 아니라 뱀들이 우글거리는 폐허였으니 말할 나위도 없었겠지요. 그렇지만 안주인께서는 흔쾌히 승낙을 하고 손수 호미로 마당의 잡풀들을 없애면서 집안을 단장하셨답니다. 하루는 야심한 밤에 안주인이 일어나 밖엘 나갔답니다. 왜 그러나 하고 몰래 따라 가 봤더니, 멀찍이 떨어진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안방으로 들어오더랍니다. 실은 이곳이 인가가 없고, 또 강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여럿 있고 해서 다른 이들이 기가 센 곳이라 두려워하는 곳이랍니다. 그런데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태연히 한밤중에 멀리 떨어진 외등도 없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을 보고 난 후에 우리가 이젠 여기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드셨답니다. 자제 분들도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시게 되었냐며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지붕이나 담벼락 구멍난 곳을 일일이 다 메우고, 지붕에 쌓인 낙엽도 다 긁어내리고, 먼지에 덮인 천장을 일일이 닦아내느라 힘이 들었다고 합니다. 살림채와 정자의 천장을 일일이 다 닦았다고 합니다.
주변환경 조성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가 몇 년 전에 이곳에 와 봤을 땐 주위 숲에 자잘한 소나무가 구불구불하게 많이 자라있었습니다. 지금은 간벌을 하고 난 뒤라 나무 사이의 간격이 적당하고 눈이 시원한 게 전망도 매우 좋습니다. 이게 다 농학박사이신 주인의 배움과 관련이 있는 듯 합니다.
하회마을 보존회장을 맡으면서
“할 일이 많았지. 우선 첫째 하회경관을 새롭게 해야 되겠다. 만송정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다고...죽이기만 하고 새로 심지를 않아서... 그래서 보존회장 할 때 35포기를 새로 심었다. 더 있었으면 저기 느티나무까지 했을 것인데...헬기장 없애고 나무를 심을 계획이었는데...끝을 보지 못하고…….”
하회마을 보존회장을 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하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가를 여쭈어 보니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겸암정사에서 보니 만송정 오른쪽 색깔이 연한 나무들이 보입니다. 옛적에는 종류도 다양한 나무들이 더 넓게 있었다고 합니다. 상가 이전에 관한 말씀도 하시는데 원래는 지금 큰 주차장 있는 곳에 상가를 만들려고 했었답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지금 상가를 만들고 있는 곳으로 옮기게 되었답니다.
“정동호 시장 당시 상가조성 이야기가 나왔는데... 상가가 밖으로 나오는 게 좋다. 그건 사실 맞다. 그렇지만 사람이 사는 민속촌이기 때문에 상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 생각은 옛날에도 장터가 있었고 주막도 있었고...큰 주차장으로 옮기려고 했었는데 잘 안 됐고 노가리로 가게 결정이 됐을 때 논란이 많았지만...그러면 나가는 조건으로 하회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보상대책을 내 놔라.”
역시 돈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었나 봅니다. 여러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많은 조율이 필요했고, 지금도 논란의 소지는 어느 정도 남아 있다고 하겠지요.
“꿈은 있었지만 너무 짧은 기간이라...6개월간..유교문화개발단장에게 ‘남포홍교’를 만들어라...”
예전에는 나무다리도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 건너편 남산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작은 다리였는데, 사람들만 다니는 작은 다리였다고 합니다. 강가 제일 폭이 좁은 곳을 연결한 이 다리는 남산에 나무하러 갈 때, 아낙네들이 중참을 이고 다닐 때, 학생들이 학교 다니던 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마을은 알게 모르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꼭 누구를 위해 좋게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따지는 것은 우스울지 모르지만 그래도 변화의 주체는 마을주민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관광지로 변해가는 하회는 그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남포홍교가 생긴다면 하회의 새로운 볼거리가 될 것은 확실합니다. 잃어버렸던 하회의 모습 하나를 찾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벌써 그러면 입장료는 어떻게 받나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안분자족을 꿈꾸며
마을의 발전에 대해서 여쭤봤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글쎄, 이 뭐 사실상 하회라는게 뭔가 변모를 가져와야 할 일인데 우선 첫째가 마음의 화합이라. 화합 없이는 사회는 발전이 없다. 그래서 전부 사실상 타성화 되어 있는 게 돈이라. 장사를 하다보면...예를 잃게 돼....돈의 근육이 붙어서 뻣뻣해져....쳐다보고만....무형문화가 살아야 옳은 정신이 정착이 되고 ...앞으로를 바라보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달에 만난 사람마음의 변화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이 생활을 해야지 ‘고생스럽다’, ‘놀고 싶다’, ‘가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면 여기 못 있어...고향에 와서 내가 교수니 박사니 얼굴을 내세우지 않고, 소용이 없어. 이런 걸 다 들어내고 일가와 주변인과 같은 위치에서 손수 모든 것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예우를 해 준다. 고향에 필요한 사람으로 존재해야겠다. ‘에헴’ 해봤자 소용없다. 12대조 할배 겸암 류운룡 할배의 음덕을 받고 보답은 고향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안주인께서 매화차를 한 잔 내 주십니다. 쌉싸름한 맛이 코를 시원하게 해 줍니다. 겸암정 마루에는 안주인께서 적적하실 때 한지로 만든 상이 있습니다. 차를 내 주시고는 비가 그친 담벼락의 풀들을 호미로 메고 있습니다. 소박한 일상입니다. 마침 찾아 온 일가 조카분과 함께 바둑을 두시기 시작합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겸암정 부분만 보수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송현동 아파트로 옮기신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금방 겸암정의 화초들과 물소리 바람소리들을 그리워 하실거라고 생각됩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