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내용

학가산 보문사(글/윤천근)

우중산행
2005년 6월 10일.
보문사 취재를 나가기로 약속한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의 취재라.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취재를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의 게으름이 차일피일 일을 미루다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시점에서 이 날의 산행을 약속한 탓이다.
입맛이 썼으나 어쩔 도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 속에는 오히려 즐거움이 일었다. 이제까지는 비 오는 날 취재를 나가 본 적이 없지 않는가? 색다름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우리가 낯선 땅을 찾아나서는 이유도 거기 있고, 다른 사람의 삶을 기웃거리는 까닭도 거기 있는 것이 아닌가.
어디 색다름이 낯선 것에만 있을 것이냐? 이미 익숙한 것들 속에도 색다름은 놓여질 수 있는 것이리라. 학가산 기행은 나로서는 이미 2년째 반복하는 것이니 산 속의 대상들은 조금씩 차이나는 것일지라도 산 자체는 매양 그러한 모습으로 그 대상들 너머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곤 하였다. 매양 그러한 학가산의 모습은 빗 속에서는 생생한 느낌으로 들깨워질 것이리라. 기대감이 나의 마음 속을 점령해갔다.
동행취재를 나서는 김복영씨도 비 오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하였다. 나는 비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 넓은 밀짚모자를 마련하였고, 김복영 씨는 작은 우산 하나를 준비하였다.
우리는 예천 쪽으로 나아갔다가 보문사를 찾아 들어갔다. 2차선의 국도를 버리고 보문사 입구로 들어서니 예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보문사 2.5키로 라는 안내판의 화살표가 가르키고 있는 도로는 1.5차선 정도의 폭 좁은 것이었다. 그것은 보문사 영역에 가까이 가면 더욱 좁아져 1차선 정도의 폭으로 바뀌어졌다. 이 정도의 폭을 갖는 도로는 늘 나를 가슴 설레이게 한다. 물론 어디 급히 가야할 필요가 있을 때는 예외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라 하니 이 정도의 변덕은 부려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때는 6월.
다른 해와는 달리 절기가 늦어서 족히 한달 정도는 달력이 앞장서서 치달려 가니, 주변 풍경을 6월이라는 것으로 추상하는 것은 적절치가 않다. 신록의 시기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짙은 녹색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때라 하는 것이 적당하리라. 색깔들은 먼 산 깊은 곳으로부터 길러져 경사진 산기슭을 타고 흘러내리고, 끝내 인간의 세상에까지 손을 뻗는다. 시계 가득히 비가 내려서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주니, 그 빛깔들의 기세는 더욱 도도하기만 하다. 그것들은 길 이쪽 저쪽의 논 밭으로 펼쳐지기도 하고, 길 가의 무성한 수풀 속에 무리로 숨어 폭 좁은 시멘트 도로를 요격하기도 한다.

빗방울 교향악
포도 위에는 빗방울이 지천으로 떨어져 무수한 왕관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자잘한 물의 기호들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고, 나의 마음을 뛰놀게 한다.
보문사 경내를 구획지우는 석축보문사에 들어갔을 때, 그것들은 우리를 뒤따라와,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 앞서 당도하여 무수한 물방울의 화음으로 경내를 온통 사로잡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보문사 경내에는 빗방울과 바람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들과 우리가 있을 뿐이었다.
넓은 주차장의 시멘트 포장 위에 뛰노는 빗방울의 약동도 기가 막힌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압권인 것은 극락전 앞에서 보고 느낀 보문사의 모습이었다.
이날 보문사에서 만난 비의 신이 있다면, 아마도 그 신체는 여성이리라. 부드럽고 날렵하게, 가만히 읖조리듯이--- 앞의 것은 이날 보문사에 내리던 비의 자태이고, 뒤의 것은 그 비가 보문사 경내에서 만들어내던 소리였다.
보문사 경내는 3단으로 구획되어 있다.
일주문도 없이 은행나무 길을 돌아들면 바로 넓은 주차장이 나오고 그 한쪽 끝에 서 있는 비석 둘이 보인다. 이것이 보문사 경내를 구성하는 제일 아래 영역이다. 시멘트 포장이 말끔하게 되어 있는 주차장의 북쪽 끝은 커다란 자연석을 쌓아 올려 위 영역과의 단층을 극복하고 그 위에 키 낮은 향나무를 심어 마무리하였다. 석축 동쪽 끝에 마련되어 있는 우물터의 돌계단을 통하거나, 또 그 동쪽으로 돌아가는 경사길을 오르면 보문사 경내의 제 2단, 두 채의 요사채와 그 사이의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온다. 이 공간은 조금 신경 써서 묘사할 필요가 있다.
이 공간 서쪽의 요사채는 살이 넓은 복집인데, 남쪽에는 주방이 들어서 있고, 주방 입구의 처마 밑으로는 보문사라는 한자 현판이 나붙어 있다. 일주문도 정문도 따로 없는 보문사 경내의 대표적 건물이라 하겠다. 이것과 극락전 만이 오래된 건물이고, 다른 건물들은 다 새로 지은 것이라 하니, 그것으로 여기에 보문사 현판이 나붙어 있는 이유가 설명될 수 있으리라. 주사의 뒤쪽은 요사채로 쓰이는 부분이고, 그 동쪽의 처마 밑에는 염불당이라는 당호가 나붙어 있다. 주사가 남향하고 있는 것이라면 염불당은 동향하고 있는 건물이라 하겠다. 이렇게 두 가지 성격을 지니는 건물이 한데 합쳐져 길기도 하고 두텁기도 한 복집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보문사의 연륜을 느낄수 있는 서쪽 요사체동쪽의 요사채는 서향하고 있는 긴 것으로, 적묵당이라는 당호가 붙어있다. 실로 고요하고 말이 없다는 이 당호의 의미가 우리가 찾았던 이날처럼 빛을 얻었던 적은 또 없으리라. 적묵당의 뜨락에는 이쪽 저쪽으로 고무신 한 켤레와 서 너 켤레 슬리퍼가 놓여져 있 을 뿐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세속의 때가 묻은 상투적인 신발장이 하나 뜨락 한쪽에 붙여 세워져 있기도 하였는데, 그 낡고 퇴색한 색감과 그 위에 올려 놓은 목탁 하나가 그 속기를 단숨에 걷어내어 별로 이질적인 물건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진실로 무슨 생뚱맞은 농담처럼 낯설게 느껴졌던 것은 그 옆 벽에 붙은 우편함에 쓰여진 글씨들이었다.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 158번지 세대주 함태완(도문). 스님, 주지 이런 말들이 놓여질 자리에 세대주라는 이름이 붙는 것이 나로서는 어떤 신랄한 농담보다도 더 실소를 자아나게 하는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북쪽은 높은 석축 위에 버티고 선 극락전이 막아주고 있었고, 남쪽은 주차장이었는데, 주차장이 한 층 낮은 아래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건너산을 향하여 열린 공간이 되었다.
적묵당과 염불당의 요사채는 낙수가 떨어지는 면에 일선으로 자잘한 자갈돌을 채워 넣어 바닥이 패이고 흙이 튀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다. 그 바깥의 마당은 석분이 깔려 있었다.
비는 그리 세차지도 않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세력이 약해진 것도 아닌 적당한 기세로 그 공간 안에 가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동 서 요사채의 용마루 안쪽에 떨어진 빗물은 조금씩 단층을 지으며 이어져 있는 암기와의 골진 면을 타고 내리는 동안 실개울 같은 줄을 이루고, 끝내는 여막새의 용의 혀처럼 사선으로 내민 호선 끝에서 방울져 떨어진다. 그것은 염불당의 한쪽 끝이나 석축 위 극락전 영역에서는 화강암 포석의 맨질맨질한 표면에 떨어져 부서지고, 적묵당이나 염불당의 주사 쪽 영역에서는 일정한 폭을 이루며 깔려 있는 자잘한 자갈돌 위에 떨어져 내리며 슬며시 스며든다. 염불당, 적묵당, 극락전의 모든 여막새들은 줄을 지어 서서 일정한 속도로 낙수들을 떨어뜨리고, 조용하고도 규칙적인 화음을 만들어낸다. 그 낙수물의 자태와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는 이 영역을 바닥에서 지배한다. 허공을 타고내리는 빗방울의 다양한 자태와 가끔씩 산기슭 끝으로부터 시작하여 비좁은 분지를 휩쓸고 와서 여기에 까지 이른 바람의 작은 반란들이 그 사이를 메꾸며 국면에 변화를 준다.
보문사 금당인 극락보전과 승방 적묵당그 몸짓들과 소리들의 은은하고 부드러움을 또 어디 가서 엿볼 수 있을까? 갑자기 나는 장예모 감독이 연출하고 이연결이 주연하였던<영웅>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진시황을 위협하는 세명의 자객 중 하나 은모장천과 주인공 무명(이연결)은 빗속에서 생사를 결하는 결투를 벌인다. 그 장면의 배경을 이루는 빗소리와 빗방울의 자태는 부드러움 속에 얼마나 섬뜩한 예기가 담겨질 수 있는가를 알게 하는 하나의 전범이다. 일찍이 빗소리와 낙수의 움직임을 장예모처럼 이렇게 미학적으로 잘 이용하였던 적은 없다.
여기 보문사 영역에서는 빗방울을 가르며 적을 향해 뻗어지는 칼끝의 예기는 물론 없다. 그러므로 신경줄을 팽팽하게 당겨 놓은 것 같은 긴장감은 느낄 필요는 없다. 사실 그런 긴장감이야 인간의 역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던가? 보문사 영역 안에는 그저 국면 전체를 부드럽게 바닥에서 하나로 묶어주는 화음, 그래서 고적함을 뇌살적인 미학으로 탄주하고 있는 빗방울의 교향악이 있을 뿐이다.

나는 오래 그 적막함의 미학에 취해 있었다. 소리보다는 자태가 더욱 매력적으로 나의 시선을 포박하기도 하였고, 자태보다는 소리가 더욱 깊숙하게 나의 의식을 침몰시키기도 하였다. 나의 육신은 점점이 흩어져 빗방울로 방울져 내리기도 하였고, 빗소리로 흩어져 나가기도 하였다.
이런 날 산사에서는 누구라도 쉽게 불성을 이루리라. 그저 빗방울을 지켜보고 빗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속기를 떨쳐내는 수도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니 말이다. 물론 문을 열고 빗줄기와 마주하는 선택은 있어야 할 것이지만.
빗방울 속으로 숨어들고, 빗소리 사이로 잦아드는 나를 끌어낸 것은 풍경소리였다. 성불사에서 객의 잠을 깨웠던 풍경소리가 보문사 영역에서는 빗 속에 숨어들던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하여 나는 아쉬움을 삭히며 세속의 풍진 속으로 돌아왔고, 속기 가득한 눈으로 보문사를 묘사하는 붓대를 놀리는 수고를 다시 나의 업으로 받아들여야만 하였다.

극락보전 영역
보문사 영역의 제 3단은 극락보전으로 대표된다. 요사채 마당으로부터 가파른 돌계단을 11개 밟고 오르면 극락전의 뜨락이다. 극락보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좌, 우, 중앙 등, 세 곳에 마련되어 있다. 계단은 가파르다. 그만큼 석축이 높이 지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락보전의 외양은 단아하고 아담하다.
“문화재 자료 203호. 1988년 9월 23일 지정.”
극락보전의 이력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보문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 때에는 보조국사가 여기 머물러 <<화엄신론>>을 읽다가 득도(명종 14년, 1184년)하였다. 고려 때에는 이 절에 <<고려사>>를 보관하였으나 우왕 7년(1381년) 충주의 개천사로 옮겨 갔다고도 한다. 조선 태종 7년(1407년)에는 선 교 분리 정책에 의거하여 교종사찰이 되었다. 선조 2년에는 절이 기울고 허물어져 법우화상이 중수 하였는데, 이것이 선조 25년(1592년)의 임진년에 병화를 입어 소실되고 극락보전과 당우 한 채만 남았다. 보문사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1962년에 최보산 화상이 법당과 당우를 중수한 이래 최화운 화상, 김도명 선사 등이 차례로 이어가며 중수를 완성시켜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청아한 울림으로 속진을 털어내는 풍경이상은 강산정후가 지어서 보문사 경내 입구에 세워놓은 비석의 명문을 토대로 한 보문사의 역사이다. 이 비석이 세워진 것은 불기 2547년(계미년)이다.
보문사가 여러차례 중수를 거듭하고 있으니, 오늘날 남아있는 극락보전이 언제적 것인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따로 정밀한 연구가 필요한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다만 안내판의 기록을 옮겨 놓는 것으로 그치기로 한다.
“고려 명종 14년 보조국사 지눌이 머물면서 극락전을 비롯한 염불당, 나한전, 반학루, 원당, 운계암, 조실 등 7동의 건물을 복원하였는데--- 임난 때 불타고 --- 극락전과 반학루 및 3층석탑이 남아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극락전은 조선 중 후기 건축양식이 절충되어 나타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1700년 후반의 건축으로 주심포계와 익공계 양식이 절충되어 나타난다.”
자연석 기단위에 단아하게 앉은 3층석탑극락전이 임난의 병화에도 남아 있었다면, 그리고 그 후에 다시 복원한 바가 없다면, 그것은 고려 양식을 갖추고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오늘날 극락전은 조선 중 후기 양식이다. 이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 것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극락보전 처마의 네 귀퉁이에는 풍경이 매달려 있다. 작고 앙증맞은 종 아래에 철판으로 만든 물고기가 들어있는 것이다. 물고기는 종보다 더욱 크다. 그러므로 종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래에 묶여있는 것이겠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것은 건듯 움직여 풍경소리를 지어낸다. 여러번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라 한번 청아한 울음을 울고, 여운이 길게 이어지는 풍경소리이다.
극락보전 천정은 연등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연등에 달린 꼬리표에는 주소, 생년, 이름이 씌여 있다. 부처님의 가호에 한 해의 안위를 맡기고 있는 이들의 염원이 방안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이다.
극락보전 동쪽 벽에는 속이 얕은 벽장이 마련되어 있다. 그곳에는 이 절집에 맡겨진 망혼들의 사진이 빼꼭하다. 사진들은 하나같이 작은 사진틀 속에 들어 있다.
극락보전 뒤울에는 쓰고 버린 초들이 담긴 자루가 셋, 벽에 기대 세워져 있다. 하나같이 소원성취 띠를 두르고 있고, 흐르다 굳은 촛농이 두껍게 매달려 있는 것들이다.
극락보전 불단의 서쪽 끝에는 벽걸이 형 전자시계가 매달려 있다. 뉴 스타 전자시계. 그 검은 빛 나는 사각의 화면에 붉은 숫자가 아로새겨져 있다. 11:21. 내가 있는 시간대를 표시하는 기호이다. 11과 21 사이에서 두 개의 점이 위태롭게 점멸한다.
이 시계의 분단위를 재는 시간과 점멸하는 두개의 점은 부처님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네 속기 가득한 인간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 어느 만큼은 위기의 사람이고, 어느 만큼은 시간에 묶여있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가호를 필요로 하고, 부처님의 가호를 끌어내기 위한 정성을 바쳐야 할 사람들이다. 대웅보전은 그런 우리의 욕망과 기도가 뒤섞여 있는 절집의 분위기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솔숲에 싸여서 솔숲을 바라보고 있는 비오는 날의 보문사주차장 영역이 신도들의 영역이고, 요사채 영역이 스님들의 영역이라면, 극락보전 영역은 부처님의 영역이다. 극락보전은 그 영역의 서쪽 끝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그 동쪽은 옆으로 조금 나아가 넓은 공간을 만들고 있었는데, 목하 한참 불당들을 건축 중이어서 건축자재가 공간 가득 널려 있었다. 그 넓은 공간은 적묵당의 뒤쪽에 적묵당의 지붕 높이로 열려 있었다. 그 북쪽 끝에는 나한전이 지어지고 있었고, 적묵당 바로 뒤에는 삼층석탑이 놓여 있었다.

삼층석탑은 마치 적묵당의 지붕을 내려다 보고 잇는 형상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배치라는 느낌이 강하였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86호. 이 탑은 대웅전 오른쪽 마당에 위치해 있었으며 2중 기단에 3층 몸돌을 --- 고려전기에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일반형 석탑--- 몸돌의 높이 197센치, 기단부 높이 172센치--- 지눌이 중창할 때 이 탑을 나한전 표증석탑으로 운계암 뜰에 세웠다고 전하며, 그 후 운계암은 없어지고 3층석탑만이 현존---”
안내판의 기록은 대개 이상과 같다.
석탑은 넓은 판석 위에 놓여져 있다. 바닥에 붙은 판석이 아니라 떨어져 있는 것이니, 석탑을 안치하기 위해 옮겨온 것이 분명하다. 그 위에 2단의 기단이 놓이고, 또 그 위에 3층의 석탑이 지어져 있는 것이다. 기단의 높이는 석탑의 높이와 비슷하다. 그러니 석탑은 높은 대 위에 놓인 형상이라고 하겠다. 석탑은 잘 탁마된 화강석으로 지어져 있는데, 바위면을 매끈하게 다듬은 솜씨가 탁월하게 느껴졌다.

보문사 영역의 소나무들
우리가 보문사 영역에 머물고 있는 동안 스님 한분이 염불당 쪽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다른 누구도 본 바가 없다. 인간은 부재하고, 아니면 인간은 부재한 듯 숨겨져 있고, 공간과 자연만이 혼자 남아 있는 곳, 그곳이 보문사였다.
아마 우중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우중에 이 산 속 까지 찾아들 사람은 실로 많지 않을 것이 분명한 노릇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우중산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사람이 비워놓은 산사에서만큼 고적함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은 없을 터이니까 말이다.
그저 산 속에 혼자 있을 때에는 자연을 느낄 수는 있어도 고적함을 느낄 수는 없다. 고적함은 인간의 물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되 인간이 비워놓은 자리에서 절감된다. 우중산사, 스님들조차도 어디 칩거해 버린 산사야말로 그런 고적함을 느끼기에 십상인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멀리서 보문사를 다시 바라보았다. 빗사이에 숨어서 보문사를 곁눈질하고 있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보문사 위쪽 산기슭에서는 키 높은 소나무들이 고개를 빼어 보문사 경내를 굽어보고 있었다. 보문사를 떠나는 길의 양 켠에 서서 우리를 마지막 배웅해 준 것도 잘 가꾸어져 있는 소나무숲이었다.
우리는 잠시 왔다가 떠나는 객이지만, 그들 소나무들은 오래 머물러 보문사 영역을 지키는 주인일 것이었다. 그들이 보고 느끼는 보문사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처럼 고적함을 통하여 보는 보문사일까?
제발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여 보았다. 보문사의 고적함이 빗 속에서 드물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러한 것이라면, 그래서 우리가 인간의 속기에 지치고 피곤하여 졌을때 그 곳을 찾으면 언제라도 그 고적함으로 우리를 위안하여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 것이겠는가?<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