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도 낙으로 여기고 살아온 류탁용씨(글/김영희. 사진/박영대)
그를 만나러 가는 날은 그야말로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따스한 햇살이 한없이 좋은날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충무로에서 내려 중구청 정문 앞으로 갔다. 시간은 오후 2시 정각. 전화를 했더니 금방가겠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혼자 정문 앞 가로수에 기대어 서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콩점을 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일까 하면 그냥 지나치고, 저 사람인가 하면 그냥 지나치고 한참이 지나도록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에 50은 넘은 아저씨에 혼자 오는 사람에 또 고생을 무지하게 했다고 하니 약간은 지친 모습? 달리 어려운 점괘는 아닌데 계속 못맞히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불쑥 다가온 아저씨가 ‘전화하신 분이세요?’하면서 드디어 말을 걸었다. ‘예’하고 얼른 따라가는데 의외로 귀여운(?) 외모에 지친 모습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의 점괘가 빗나간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희망에 부푼 서울행
“제가 지금은 이렇지만 어릴 때는 얼마나 귀엽고 통통한 얼굴이었는데요. 고향 여자애들이 엄청 절 좋아했어요.”
라고 말해 호탕하게 같이 웃었다.
류탁용(1951년생, 55세)씨의 고향은 임동면 무실이다. 행정구역 이름은 수곡동. 임동면의 무실, 한들, 박실 세 동네 중에서 무실출신이다. 당연히 임동초등학교(40회)를 졸업했다. 그리고 아쉽게도 학교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임동중학교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다. 그길로 목동과 지게꾼으로 나앉았다. 집에서 기르는 소를 치는 일이 그의 몫이었고, 지게 지고 술맷재로 서당골로 큰골로 아기산으로 다니며 나무를 해다 나르는 일이 그가 해야할 일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매일 지게지고 다이아몬드표 고무신 신고 아기산 꼭대기로 알갈비 끌러 다녔다’고 한다.
열일곱살이 되었을 때 목동과 지게꾼 생활에 지친 그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마침 안동에서 청량리까지 가는 증기기관차가 있다는 소문이 무실 산골까지 나 있었다. 서울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친구와 셋이서 부모님 몰래 서울행 열차를 탔다. 석탄을 태운거라 연기가 얼굴을 시커멓게 그을렸지만 그래도 그 연기는 그의 마음을 희망으로 한껏 부풀게 했다. 그게 생고생의 시작인줄은 그때는 몰랐었다.
인연
서울에 도착한 세 명은 연고가 있는 곳으로 각자 흩어졌다. 한 친구는 왕십리에서 쌀장사하는 집으로 가고, 한 친구는 친척이 하는 왕관페인트 공장에 취직했고,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그는 당시 국립묘지에 취직해 있던 사촌형님 댁으로 갔다. 형님의 주선으로 미군부대에 팻플보이(?, 그냥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로 취직을 했다. 통행금지가 있을 때였지만 미군에게는 해당되지 않아서 새벽에 일을 했는데, 노란 조끼를 입고 미8군에서 신문을 배급받아 동두천으로 배달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영어도 전혀 모르는 상태여서 답답하기 그지없었지만 배우는 것도 마땅치않고 겨우 ABC나 터득할 정도였다. 그러니 몇 개월을 해도 별로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아는 사람이 기술자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해서 기계깎는 일을 배웠다.
기술자 생활을 2년여 하는 동안 서울 생활에도 익숙해지고 아는 사람들도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갔다. 나이도 어느결에 20살이 되었다.
그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남대문에서 고기를 배달하는 일이었다. 오토바이에 돼지고기를 담은 바구니를 싣고 각 정육점으로 배달하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배운 기술이 아깝긴 했지만 경제적으로나 장래성으로나 더 나을 것 같아 전업을 했다. 몇 개월 일을 하다보니 고기유통의 흐름이 어떤지 눈도 뜨이고 늘 성실하게 일하니 믿음도 생기고 돈도 모였다. 그걸 바탕으로 직접 중간상인으로 나섰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돼지고기를 떼다가 직접 거래처로 팔았다. 한 9년 정도 했는데 이때 돈을 많이 벌었다. 그의 인생에서도 가장 부유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돈 있는 젊은이들만 타고 다닌다던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고 오토바이 타고 군대 있는 친구들 면회가기도 했다.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고향에 있던 동생도 서울로 데려와 함께 지내고, 가끔 부모님을 뵈러 고향으로 내려가곤 했다. 고향에서도 서울 총각이라고 또래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았다.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가면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때라 호롱불을 켜 놓고 모여놀다 일부러 불을 꺼트려 놀래주기도 하고, 남의 집 방구들도 꺼줗고, 뒤안에 묻어둔 김치 꺼내먹다 들켜서 도망가다 흙담도 무너뜨리고 걱정없는 장난꾸러기 아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무렵에 결혼도 했는데 비밀이 하나 있다며 조심스럽게 이야기 해주었다. 안동을 오가며 기차에서 만나 마음에 둔 아가씨가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어느날 선볼 날짜를 잡아오셨다. 아버지 말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냥 건성으로 볼 요량으로 선을 보러 안동으로 내려왔다. 밤새 야간열차를 타고 와서 오전에 버스터미널 학다방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만 잠을 자는 바람에 영천까지 가버렸다. 부랴부랴 돌아왔지만 약속시간에는 늦고 아버지께 무지 야단도 맞았는데 만날 인연이었던지 다행히 선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양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결혼할 인연이었던가 보다고 했다. 아마도 그랬던가 보다.
IMF와 새로운 시작
결혼도 하고 사업도 안정적이고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았는데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우리나라 돼지고기는 껍질을 그대로 먹는 거였는데 껍질을 벗긴 탈피된 돼지고기가 수입이 되었다. 그러자 국내 돼지고기 시장이 감소될 수 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그는 일을 정리하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종합 전자대리점을 열었다. 사업규모가 상당히 커졌다. 나름대로 부지런히 일해서 아이들 공부시키며 소시민의 생활을 이어가던 그에게 IMF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주었다. 부도가 나서 완전히 망해버렸다. 구치소에서 한 달을 보내기도 했었다. 모두 다 없앨 뻔 했는데 다행히 집 하나 달랑 건지고 알거지가 되다시피 했다. 1남 1녀인 아이들은 커서 대학생이 되어 한창 목돈 쓸 일이 많고, 일은 없어 집에서 눈칫밥만 먹고 있자니 딱한 노릇이었다. 결혼 하던 첫날 밤에 아내에게 돈은 못 모아도 아이들 공부는 꼭 시키자고 약속했었는데, 자신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삶의 벽이 너무 높게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이들에게만은 절대로 그 아픔과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겪고보니 답답할 뿐이었다.
집에서 지낸지 1년 정도 지난 어느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자신보다 나이많은 운전기사에게 눈길이 갔다. ‘저 나이에 버스운전을 할 정도면 나라고 못하겠느냐’고 생각한 그는 그날로 당장 대형면허를 따러 학원에 갔다. 사장님 소릴 듣던 사람이 웬걸 하겠냐고 믿지 못하던 아내도 직접 학원에 가서 보고는 격려해 주었단다. 연습땐 잘 되었는데 아내 앞에서 한 번 해보려니 떨려서 자꾸만 실수를 했다. 시험 보는 날은 응원오겠다는 아내를 말려 혼자서 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했다. 급한 마음에 대형면허 자격증을 들고 버스회사로 달려갔더니 경력이 없어서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마을버스 운전기사로 취직해서 18개월을 일하고 지금의 선일교통에 취직을 했다. 처음에는 대형버스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다른 차를 박기도 하고 길가에 있는 물건을 부수기도 해서 숱하게 돈을 물어주어야 했다. 지금 한 5년 정도 운전을 하니 이제는 베테랑이 되었고 본인이 생각해도 유능한 운전기사인 것 같다고. 그전에는 운전만 하면 되었는데 서울시 교통정책에 따라 제도가 바뀌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신경써야 할 것이 많아졌단다. 현대식 시스템에 적응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듯했다. 조그마한 불친절이나 안전사고도 모두 벌점으로 연결되어 인사에 반영되기 때문에 운전을 하는 동안은 아주 신경을 써야 한단다. 지금은 4.19 국립묘지에서 서울역을 오가는 104번을 운전하고 있다.
힘든 일은 지나고
듣기로는 고생을 무지하고 안해본 일 없이 다 했다고 해서 엄청 고생 한줄 알았더니 얘기 들어보니 별로 고생스럽지 않은 것 같다고 했더니 그게 고생이지 뭐가 더 고생이냐고 웃었다. 자신은 많이 못 배워서 무척 힘들게 살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많이 배운 초등학교 친구들은 지금 출세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친구들 자랑을 했다. 고생을 많이 하고 살았지만 잘난 친구들을 자랑할 여유가 있는 것은 그 자신도 힘은 들었지만 실패하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돈은 못 모아도 아이들 만큼은 잘 키우겠다고 한 아내와의 약속을 잘 지켜서 두 아이들 모두 4년제 대학을 나와 직장을 다니고 있다. 아내도 그가 부도나면서 일자리를 구했는데 지금까지 즐겁게 일하고 있다. 아내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인 것 같다. 본인도 버스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건강하게 살고 있다. 사업을 할 때보다 아내가 더 좋아하고 부부사이도 더 좋아진 것 같다고 흐뭇해 했다. 통장도 여러 개 보여주었는데 이제 막 결혼해서 새 살림을 시작한 신혼부부처럼 들떠 보였다.
그와 대화를 하다보니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할 뿐 아니라 아주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사람으로 느껴졌다. 고향의 친구들 얘기를 들려줄 때는 애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요즘 새로운 즐거움이 있다면 임동초등학교 40회 동창들과의 만남이다. 한 30명이 서너달에 한 번씩 모이는데 고향이야기나 어릴 적 얘기를 하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단다. 동네 앞 강변에 가설극장이 서서 발동기 돌려서 영화보던 일이며, 톳제비 나타났다고 놀랐던 일, 개골강아지 흙퍼부어서 무서웠던 것, 문둥이가 간 빼먹는다고 단체로 모여서 마음 졸이며 학교 가던 일 등 어느것 하나 즐겁지 않는 것이 없단다. 혼자서는 기억나지 않던 일들도 같이 얘기하다 보면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이렇게 늙어서 그런 추억이 없었다면 무슨 재미로 사나 싶을 만큼 고향에서의 추억은 정답다.
댐이 생기면서 88년도에 부모님들이 구미로 이주를 해서 구미에 자주 가지만 추석에는 꼭 임동으로 간다. 친척들이 가랫재 휴게소에서 모두 만나서 각자 흩어져 성묘를 하고 무실에서 다시 만나 추석을 지낸다. 현재 구미에는 올해 여든이신 아버님만 계신데 뇌출혈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해 계신다. 3남 1녀의 자식 중에 아버지 덕을 많이 본 자식들 다 놔두고 왜 맏이 혼자서 다 하느냐고 아내는 싫은 소리도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는 당연한 일이라고 한마디 할 뿐이다. 4년전 어머니도 뇌출혈로 쓰러져 보름만에 돌아가셨는데 고생만 하다가 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많이 아프다고 한다.
화창한 날씨 만큼이나 속이 시원한 류탁용씨와 얘기를 하다보니 힘든 현실이지만 더 열심히 즐겁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막 든다. 그에게도 이제는 힘든 일이 하나도 안생겼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건 그에겐 힘든 일이 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궁금해 하는 분들을 위해 함께 서울로 도망 온 나머지 두 분의 소식을 전하자면 한 분은 먼저 돌아가셨고 또 한 분은 지금 영종도에서 크게 사업을 하고 계십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