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소, 영남 유생들의 집단적 정치 참여(글/정진영)만 명의 유생이 상소하다
조선시대 향촌의 유생(儒生)들은 말 그대로 서울과 멀리 떨어진 지방 선비에 불과하였지만, 그들은 중앙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엄연한 정치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교통편이 원활한 것도 아니었고, 선거라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들이 어떻게 중앙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참여할 수 있었을까?
조선왕조에서는 천재지변이나 국가의 중대사에 국왕이 교서를 내려 대소신료들과 향촌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널리 시정(時政)에 대한 방책을 구하는 이른바 ‘구언(求言)’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지방의 유생도 여기에 응하여 그들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언은 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또한 개인적인 입장 표명에 불과하였다. 유생들은 그들이 필요한 시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그들의 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소(上疏)라는 제도이다.
향촌 유생들의 상소를 흔히 유소(儒疏)라고 하였다. 그것은 중앙의 관료들이 직무 수행의 일환으로 행하는 상소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생이란 생원, 진사와 유학층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유소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읍이나 도를 단위로 한 대규모 향촌 유생들의 집단적인 의사 표명이며, 이것은 유림의 공론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유소 가운데서도 특히 18세기 후반 정조대 이래 만여 명에 이르는 유생들이 참여한 유소를 흔히들 만인소(萬人疏)라고 하였다. 이러한 만인소는 영남에서나 가능한 것이었고, 그 중심에는 대체로 안동의 유생들이 있었다.
조선시대 비록 후기라고 하더라도 만여 명의 유생이 참여하는 만인소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만큼 명분이 분명해야 했고, 엄청난 자금의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남에서도 만인소는 정조와 철종조에 각 한 차례, 고종조에 3～4차례 정도가 고작이다. 정조와 철종조에는 사도세자의 신원(伸寃) 혹은 추존(追尊)과 관련하여, 고종조에서는 대원군의 서원훼철, 하야한 대원군의 봉환(奉還) 요구, 위정척사(衛正斥邪) 등과 관련된 만인소가 있었다. 그 대강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주 예민한 정치적인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는 그것의 처리 여하에 따라 정국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멀고도 험난한 과정
상소에 참여하는 유생은 세 층위로 나뉘어 진다. 하나는 소수(疏首, 혹은 疏頭)와 각 직임을 맡은 소임(疏任)이고, 상경봉소(上京捧疏)와 복합(伏閤)에 참여하는 배소유(陪疏儒), 그리고 단순히 이름만을 제출한 말하자면 단순 가담자로 구성된다. 앞의 둘, 즉 소수와 소임 그리고 배소유를 소유라고 한다. 일반 유소와는 달리 만인소의 소유는 수백 명에 이르는데, 지역별로 배정된다. 안동에서 가장 많은 소유를 배출하였음은 당연하다. 유소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금이 동원되어야 했다. 특히 서울과 향촌을 왕복하는 노자, 서울에서의 수십 일간의 숙식비, 특히 소수와 소임들이 귀양 가게 될 경우의 문제 등에서 엄청난 자금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자금은 이를 지지하는 관료나 재경인사들의 기부금으로도 일부 충당되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군현 혹은 향교나 서원, 문중 단위로 배정되었다.
만인소가, 일반 유소도 마찬가지였지만 발의되어 최종적으로 국왕의 비답(批答)을 받는 과정은 실로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 대강은 발의가 되면 이를 논의할 도회 개최를 위한 통문을 발송하는 과정, 도회에서 임원을 선정하고 상소를 준비하는 과정, 상소를 받들어 서울로 가는 과정, 서울에 머물면서 상소문을 제출하여 임금의 비답을 받고 돌아와 해산하는 과정 등을 거치게 된다.
중요한 국사에 대해 유림의 대표들이 논의하여 상소를 발의하게 되면, 이를 논의하기 위한 도회(都會.道會) 개최를 알리는 통문이 각지의 서원이나 향교, 문중 등으로 발송된다. 도회는 주로 주관지역인 안동이나 서울 출입이 쉬운 문경·상주향교 등에서 개최되었다. 통문을 받은 기관에서는 향중의 의견을 수렴하여 도회에 참석할 유생들을 선발하는 한편,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는 통문(이를 흔히 答通이라고 한다)을 발송하여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하였다.
도회에서 상소가 결정되면 그것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된다. 우선 상소를 위한 대표인 소두(疏頭 : 疏首라고도 한다)를 선정한다. 소두는 주로 향촌사회에서 명망 있는 인물을 천거하여 승낙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소두가 정해지면, 공사원(公事員), 장의(掌議), 사소(寫疏), 배소(陪疏), 일기유사(日記有司) 등의 다양한 소임(疏任)과 배소유(陪疏儒)를 각 군현별 혹은 문중·성씨별로 배정하고, 상소 전반을 관장하는 소청(疏廳)을 설치한다. 소청은 주로 향교나 서원이 이용되었다. 소청에서는 소문(疏文)을 마련하고 참여 유생들의 명단을 확보한다. 상소문은 학식과 문장력을 갖춘 명사에게 작성을 의뢰하거나, 여러 사람들이 제출한 글들 중에서 선택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소유들뿐만 아니라 중앙의 관련 인사들의 검토 과정을 거치면서 수정되게 마련이었다. 소문이 완성되면 각 향교와 서원, 혹은 가문별로 파악된 참여 유생의 명단을 함께 기록하여 상소문을 완성한다. 유생의 명단은 일인일항(一人一行)으로 배열하여 서명수결(署名手決)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만인소란 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였으니 상소문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될 것이다. 완성된 상소문은 소궤(疏櫃)에 보관하여 서울로 운반하게 된다. 배소유란 이 때 참여하는 유생들을 말한다.
서울에 도착한 소유들은 우선 묵을 숙소를 마련하고 재경세력들과 다양한 정보를 교환하면서 봉소(捧疏) 할 때를 정한다. 유소 혹은 만인소는 왕명출납을 관장하는 승정원을 거쳐 어전에 올라가기 때문에 승정원에서 방해하거나 지연책을 쓰면 봉소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복합할 날짜가 정해지면 소두가 소임 및 배소유와 함께 상소문을 넣은 소궤를 들고 대궐 앞에 복합하여 승정원에 ‘대개(大槪)’를 전달한다. 대개란 상소의 대강 내용이니, 이런 내용으로 상소하고자 함을 사전에 알리는 것이다.
입직승지들은 대개를 검토하여 정소(呈疏) 여부를 결정해 소본(疏本)을 들이도록 하면 명첩(名帖)이 첨부된 상소문을 제출한다. 승정원에서는 봉입된 상소를 고의로 보고하지 않거나 거부할 수 없지만, 왕명이나 왕의 병을 빙자 하여 반대당파의 상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도 하였다.
물러가 학업에 충실하라!
상소가 정소되어 이를 검토한 임금은 즉시 비답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며칠 지체시키기도 하였다. 물론 비답을 받을 때까지 소수를 비롯한 배소유들이 복합하는 것이 통례였다. 임금의 비답은 우호적일 경우도 있지만, “소(疏)를 보고 사정을 알게 되었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알았으니 돌아가서 학업에 충실하라” 등과 같이 아주 통상적인 답을 내리기도 하였다. 우호적인 비답을 받지 못한 경우에는 그냥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2～3차에 걸쳐 복합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이나 집권층의 의사와 크게 어긋날 경우에는 소두를 비롯한 간부들이 형조에서 취조당하거나 유배되기도 하였다. 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 반대를 위한 영남 만인소의 소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형리들의 엄한 감시 하에 형조와 경기 감영을 거쳐 상주로 강제 귀향 조치되었고, 여타의 소유들은 전원 한강 밖으로 축출되고 말았다. 고종 12년 양주 직곡으로 물러난 대원군의 봉환을 요구한 영남 만인소는 전후 3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의 소수와 간부들은 형조에 엄형을 당한 후에 길주와 갑산 등지로 유배되었고, 3차에는 고종의 강경책으로 처형의 위기에 까지 몰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만인소를 주도하였던 소수와 임원들은 유배나 처형되는 위험까지도 감수해야만 했다.
조선후기 영남은 줄곧 재야세력이었고, 야당이었다. 물론 15, 16세기에는 국정을 주도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 이후로 영남의 남인은 중앙정계에서 거의 배척되고 있었다. 여기에 노론 정권은 영남에 그들의 외곽세력을 부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각지에 노론계 인물의 서원이 건립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영남유림은 우계와 율곡의 승무(陞 )반대와 예론(禮論)논쟁을 통해 서인 혹은 기호학파와 심각하게 대립하기도 하였고, 정조연간에는 사도세자의 신원(伸寃)문제를 매개로 하여 정조의 왕권강화를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연간에는 서원훼철, 대원군 하야 반대, 위정척사 문제 등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사에 대해 영남의 정치적인 입장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는 의례히 국왕이나 집권세력의 방해공작과 회유, 혹은 형벌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큰 문제가 있을 때마다 만여 명이 넘는 유림들을 동원하여 경향을 오가면서 끈질기게 집단적으로 상소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남의 유림들이 향촌사회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지적 기반이란 동성촌락과 문중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족당(族黨)과 중소지주로서의 공고한 경제적 기반, 그리고 향교와 서원, 향사당 등 다양한 향촌지배 조직의 장악 등을 말한다. 여기에 세의(世誼).혼인(婚姻).사우(師友)관계 등으로 맺어진 강인한 동류의식은 상호간의 결속력을 더욱 공고하게 하였다. 이러한 배경과 사정에서 다른 지역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인소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영남의 어제와 오늘
그러나 아무리 재지적 기반과 결속력이 강고하다고 하더라도 만인소는 중앙의 세력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실행되기 어려웠다. 그것은 중대사안에 대한 정보와 국왕의 의지, 정국의 동향 등을 잘 파악하여 시의 적절하게 추진해야 했기 때문이다. 영남의 유소는 항상 재경영남세력과의 긴밀한 협조와 연계 하에서 이루어졌다. 정조가 채재공을 등용하여 왕권강화를 도모하던 시기와 대원군이 등장하여 남인과의 정치적 제휴관계가 성립된 시기에 만인소가 거행되었음은 이 같은 사정을 잘 보여준다. 결국 영남 만인소는 재경남인의 집권과 영남 유림의 정계 진출을 위한 상호 이해관계의 일치에서 가능하였던 정치적인 산물이었다.
영남의 유림이 재지적 기반과 재경세력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서 전개한 유소 혹은 만인소는 심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결과 정조의 왕권강화와 대원군의 집권에 큰 공헌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영남의 남인은 국정을 주도하지 못한 채 줄곧 재야세력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만인소가 영남의 유림에 의해 실행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진정한 주체가 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재경세력, 혹은 채재공을 매개로 한 정조나 대원군의 필요에 의해 어디까지나 동원된 셈이었다. 이것은 결국 영남 남인이 시대를 이끌어 갈 주체적인 역량이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주체적인 역량이란 조선의 봉건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경세론이나 불가피하게 마주하게 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안목을 의미한다. 18, 19세기 조선왕조의 절실한 과제는 그 무엇보다도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개혁과 밖으로는 외세와의 자주적인 관계의 설정이었다. 영남 유생들의 정치적 활동은 이 같은 시대의 요구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개혁과 자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실한 문제이다. 그러면 보수와 수구로 상징되는 영남의 미래는 어떨까?<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