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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능동재사 이야기(글/윤천근)

능동재사 영역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서후 면사무소에서 북으로 뻗은 길과 안동과 옹천 사이의 길에서 봉정사 쪽을 향해 뻗은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봉정사 쪽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성곡리, 안동권씨 능동재사(陵洞齋舍)가 있는 골짜기가 나타난다. 골짜기는 깊게 사선으로 찢어져 올라간다. 골짜기의 초입에는 커다란 규모의 비각이 있고, 재사는 그 위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골짜기가 계속하여 조금씩 높아져 가므로, 골짜기 안은 전답들이 양편으로 계단식의 모양을 갖추고 펼쳐져 있다. 그렇게 조금씩 위도를 높여가다가 산기슭과 만나기 때문에, 재사 영역 주변에서 골짜기를 둘러싸고 있는 산은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동네 뒤를 막고 서 있는 야산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능동재사 주변의 산은 실제에 있어서는 그리 험준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높이를 갖는 산이라고 하겠다.
전답의 경계가 끝나는 위쪽의 산기슭. 앞쪽에는 안동권씨 능동재사가 있고 뒤편에는 풍산유씨의 숭실재가 있다.
조용하고 한적한 산골짜기 속. 능동재사는 동향을 하여 서서 우람한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에 마을은 없다. 능동재사와 숭실재의 사이, 길가에 동편으로 올라붙은 집 한 채가 보인다. 능동재사를 관리하는 분이 사는 집이다.
능동재사는 높은 축담 위에 자리잡고 있고, 사방 울타리가 견고하게 갖추어져 있다. 문을 닫아 걸으면 들어갈 방법이 없고, 쉽게 문을 열어 주지도 않는다. 관리하는 노인을 통해서야 어렵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이다.
재사 건물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앞 뒤 산의 흐름과 평행으로 서 있다. 높은 축대 위에 선 2층 건물의 모습이 웅장하고 아름답다. 정면 7간 측면 2간의 2층 누각집이다. 재사가 자리잡고 있는 축대는 2단으로 나뉘어 있다. 2단 석축 위에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높은 집을 올려 세운 것이다.

추원루
능동재사는 안동권씨 시조인 권행의 묘제를 위해 마련한 건물이다. 조선 효종 4년 1653년에 처음 16간 규모로 건립하였고, 숙종 9년(1683년) 관찰사 권시경이 누각 7간을 지었다. 영조 19년(1743년)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고, 1896년에 또 화재를 당해 다시 지었다.
추원루(追遠樓)는 능동재사의 정문 구실을 하는 누각 건물의 이름이다.
추원루. 31세손 재형(在衡)이 썼다는 현판글씨가 중앙의 처마 밑에 달려 있다.
능동재사는 추원루의 누각 밑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누각의 1층에는 안마당 쪽을 향해 지어진 창고가 있다. 누각 아래에 들어서면 계단이 앞을 막아서고, 계단을 올라서면 안마당에 이른다. 계단은 8단으로 이루어졌다. 절집의 구조와 흡사하다. 이 점은 아무래도 재사 건물의 기본형은 절집의 구조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추원루 누각의 1층 기둥은 각진 것이고, 2층 기둥은 원형이다. 누각의 2층은 4면이 다 열려 있다. 3면이 막혀 있는 숭실재와는 다른 구조이다.
안마당에서는 2층 누마루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마련되어 있다. 계단이 있는 쪽만 빼고 나머지 부분의 안마당 쪽 누마루는 좁은 쪽마루를 덧대고 난간을 둘렀다.
2층의 누각 안에는 빼꼭하게 현판이 걸려 있다. 여러 종류의 현판이 있지만, 건물을 지을 때 헌금을 한 내역을 쓴 현판이 숫자상 가장 많다. 헌금은 아주 작은 돈에서 큰 돈까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가문에 속한 사람으로써 시조인 태사공 권행의 묘사를 돌보는 재사를 짓는데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액수의 크고 작음을 떠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헌금자 명단이 길게 이어지는 것은 안동권씨 종중 측에서 보아서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종중의 역할이란 결국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느냐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 것일 수 밖에 없는 탓이다.
누마루 위에 서면 앞쪽의 공간은 횡으로 길게 열린다. 앞을 막아서 있는 동편의 산이 횡으로 달려 나가는 탓에 밖을 향하는 것은 그렇게 매력적인 느낌을 선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쪽의 넓은 마당과 마당 뒤쪽의 높은 축담 위에 올라서 있는 재사 건물을 보고 있는 편이 오히려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능동재사의 추원루는 사방을 다 터 놓았지만 그것이 개방의 느낌을 전적으로 던져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주변 자연이 저절로 차단을 하여주는 공간인 탓에 차단에 대한 배려는 없었던 것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능동재사
능동재사는 미음자가 둘 옆으로 중첩되어 있는 구조이다. 누마루에 서서 보았을 때 누마루가 있는 쪽, 그러니까 전체 공간의 왼편에는 큰 미음자가, 오른 쪽에는 작은 미음자가 붙어 있는 셈이다. 물론 큰 미음자 쪽이 본채건물이다.
본채 건물의 안마당 아래쪽은 누마루가 차지하고 있고, 왼쪽은 정면 3간 측면 1간의 작은 건물이 막아 서 있다. 방이 두 개, 광이 하나다. 방의 기둥에는 참제원실(參祭員室)이라고 쓰인 나무쪽이 달려 있다.
본채 건물의 안마당 위쪽은 정면 7간의 건물이 높은 대좌 위에 올라서 있다. 앞쪽에 쪽마루를 두었다. 벽쪽 기둥 위에는 역시 참제원실이라는 나무쪽이 방마다 달려 있다. 오른쪽 끝 방에는 문 위 벽의 중간에 수임실(首任室)이라는 나무쪽이, 또 그 위에는 사경재(思敬齋)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건물 중앙의 처마 밑에는 능동재사라는 현판이 있다. 현판 한쪽에는 30세손 유하(有夏)가 썼다는 작은 글씨가 보인다.
사경재 앞의 마루에는 난간이 가설되어 있다. 이 마루의 오른쪽은 나무판과 나무판 문으로 되어 있어서 문을 열면 작은 미음자 영역과 통하도록 되어 있다. 건물 중앙 쪽의 앞 기둥에는 시도소(時到所)라는 현판과 안동권씨 대종회라는 현판이 각각의 기둥 위에 종으로 붙어 있다.
본채 건물 안마당의 오른쪽은 역시 정면 3간 측면 1간 규모의 건물이 가로막고 섰다. 누각 쪽 두 간은 참제원실이라는 나무쪽을 달고 있는 방이고, 재사 쪽 한간은 작은 미음자 공간으로 나가는 측문이 마련되어 있는 곳이다.

누각 쪽으로 열린 공간을 통해 작은 미음자 형 공간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위의 측문을 통해 작은 미음자 형 영역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작은 미음자 형 안마당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위쪽은 1단 높은 마당이고, 아래쪽은 한단 낮은 마당이다. 아래쪽에는 누각 건물과 일선으로 정면 5간 측면 1간의 행랑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마루방, 부엌, 행랑방 등으로 구성된다. 아래쪽의 오른편은 정면 2간 측면 1간의 건물이 가로막고 섰다. 참제원실이다. 위쪽의 오른편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건물이 막아섰다. 앞의 정면3간 측면 1간 정도는 터진 마루아다. 뒤에는 광 하나 방 2개가 가설되었다. 방의 기둥에는 재유사실(齋有司室)이라는 나무쪽이, 건물의 앞쪽 처마 아래에는 공성재(供誠齋)라는 현판이 있다.
위쪽의 뒤편은 정면 3간 측면 1간의 건물이 막아섰다. 중간은 마루이고, 양쪽은 방이다. 재사쪽의 방에는 별임실(別任室)이라는 나무쪽이, 공성재 쪽 방에는 종무원실(宗務員室)이라는 나무쪽이 달려 있다. 작은 미음자형 공간의 왼쪽은 재사 쪽 건물이 막고 있다.
능동재사가 통상적인 미음자형 구조를 벗어나 미음자가 두개 중첩되어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은 아마도 제례에 참예라는 문중 사람들의 숫자가 많았던 탓일 것이다. 이것이 동쪽으로 비어져 나간 형상인 것으로 추정을 하여 볼 때, 원래의 능동재사 영역은 물론 큰 미음자 쪽일 것이고, 후대에 이르러 참제원들의 수가 많아지자 동쪽으로 작은 미음자 영역을 하나 더 덧붙이게 된 것이라도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안동권문 사람들
안동권씨는 신라말, 고려초에 출현한다. 1988년에 안동권씨 중앙종친회에서 펴낸 『안동권씨보감』에는 ‘권’이라는 성씨의 출현 유래가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권씨는 본래 신라 왕족 김씨였다. 신라가 말기 현상으로 국력이 쇠퇴되었을 때 우리 시조 행(幸)께서 안동군을 수어하고 계셨다. 약세의 틈을 본 후백제 견훤이 갑자기 침공하여 경애왕을 죽게하고 왕비와 궁녀들을 함부로 유린…… 이때 고려 태조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또한 견훤의 위세에 당하지 못하고 실의에 빠졌을 때 우리 시조 ‘행’(幸)께서 때를 놓칠세라 고을 사람들에게 유세하기를 ‘불공대천의 원수를 물리치자’, ‘모두 모여라’, 격문으로 창의하시고 고려군을 영입하여 병산에서 견훤군을 대파하니…… 고려태조는 논공행상에서 전공이 모두 ‘행’의 덕이라 일컬으며 기미에 밝고 권도 또한 통달하였다하여 ‘권(權)’자로 성자(姓字)를 사성(賜姓)하고 안동군을 부(府)로 승격, 식읍(食邑)으로 하사하게 되어 안동권씨가 된 것이다.

이러한 안동권씨의 득성 유래는 ‘김씨’나 ‘장씨’와 상호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그 세 성씨의 시조가 ‘3태사’로 연칭되고, 안동시 중심부의 ‘태사묘(太師廟)’를 세 성씨가 울타리도 없이 함께 유지하여 오고 있는 것을 통하여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태사묘에서 만난 안동권씨 노인들은 세 성씨가 나누어져서 말해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도, 다른 두 가문과 구별되는 안동권씨만의 차별성을 은연중 확인하여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세 성씨 중 사성(賜姓) 받은 것은 우리 밖에 없어요.”
다른 가문들은 원래 김씨였던 것이 그대로 김씨로 불리워지고, 원래 장씨였던 것이 그대로 장씨로 불리워졌지만, 안동 권씨의 시조는 원래는 ‘김행’이었는데 왕건이 ‘권’이라는 성을 내려서 ‘권행’이 되었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견훤이 929년에 안동으로 들어오고, 930년에 패주하지요. 우리 가문이 ‘권’이라는 성을 받은 것이 그 930년이예요. 930년 이전에는 성이 ‘김’이었어요. 그렇지만 경주 김씨와는 달라요. 같은 신라 왕족 출신이기는 하지만, 경주김씨하고는 다르지요. 경주 김씨는 935년에 나타나요. 경순왕의 셋짼가 넷째 아들로부터 경주김씨가 시작되지요.”
‘태사묘’에서 만난 안동권씨 어른들은 그렇게 연대까지 분명하게 짚어가며 어제 일처럼 천년도 넘은 옛일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이야기해 주었다.
“3태사 중 묘가 실재하는 것은 우리 뿐이예요.”
한 노인이 말을 꺼내면 다른 노인이 이어받아 이야기에 살을 붙여가는 식으로 대화는 계속되어 나갔다.
“다른 가문들은 그냥 단소만 만들어 두고 있을 뿐이지요. 우리도 처음부터 시조의 묘가 있었던 것은 아니예요. 잃어버렸었지요. 시조 사후 5백년 후, 그러니까 1470년 경에 묘를 찾았어요.”
『보감』에도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은 보인다.

17세이신 평창(平昌)군수 권옹(權雍)이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고 시조묘를 발견하였다.

권옹은 새로 찾은 묘소에 분봉을 더하고, 다시 실전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을 그 발치에 부장하게 하였다. 권옹의 사후 그 아들인 권유(權裕)와 권작(權綽)이 유명대로 선친의 묘를 시조 묘의 아래 부장하고, 그 전말을 적은 묘비를 세웠으며, 태사공의 묘에도 작은 비석을 세웠다. 묘비는 후에 부서져서 다시 선조21년(1588년)에 경상도 관찰사 권극지(權克智)에 의하여 다시 새겨졌다. 외손인 서애 유성룡이 글을 쓰고, 21대 손 연어정(鳶魚亭) 권오(權晤)가 글씨를 썼다. 현종 2년(1661년)에는 영주군수 권성원(權聖源)이 신도비를 선립하였고, 숙종 26년(1700년)에는 비석을 갈아 다시 새겼으며, 영조 22년(1746년)에는 관찰사 권혁(權爀)이 다시 비석을 세웠다.
권행의 묘소는 천등산 주봉이 흘러내려 만든 옥녀단좌형국(玉女端坐形局)이라고 한다. 그만큼 풍수지리상으로 좋은 명당자리라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족보, 시조, 재사
인간의 역사를 혈연적 맥락 위에서 파악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역사 속에서나 살펴 볼 수 있는 문화적 양상이다. 오래 전 알렉스 헤일리 원작의 『뿌리』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쿤타킨테라고 하는 미국 흑인이 자신의 아프리카 가계 원류를 찾아 나가는 과정을 그린 글이다. 그것은 텔레비전 드라마로 수입되어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기도 하였었다. 쿤타킨테의 이야기는 자신의 혈연적 가계에 대한 관심이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범인류적인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물론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문화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완성시켜내는 것은 우리의 조선 후기 역사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족보, 시조, 재사 등의 문화적 암호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의 전개가 가능할 수 있게 한 배경에는 동아시아의 유학문화적 전통이 가로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혈연의식이야 인류 일반의 것이라지만, 그것을 사상적인 것으로 포착하여 문화의 중심에 가져다 놓는 것은 동아시아의 유학적 전통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동아시아 유학문화의 전통 속에, 어쩌면 그 결과 부분에 조선 후기의 유학 문화는 자리잡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문화를 이것을 남성 혈손 중심으로, 시조에서 나에 이르는 혈연적 관계로 포착한다. 그것은 족보를 출현시키는 문화적 바탕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족보는 안동권씨 가문에서 나온다. 통칭 성화보라고 하는 족보인데, 이것이 현전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족보라고 한다. 물론 가첩이나 가승의 단계를 벗어난 본격적 의미의 족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이전 시대에도 가첩이나 가승 같은 것들은 있었고, 족보의 간행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족보의 시대는 1400년대 초기로부터 열린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족보의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는 있으나 본격화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1476년(성종 7년)에 이 책이 나옴으로써 우리 역사 속에서 족보의 시대는 본격적으로 개막되는 것이다.
안동권씨 세보는 조선 초기를 살았던 권제(權庶)가 중국의 『소씨보(蘇氏譜)』를 모방하여 편찬한 것을 그 아들인 권람(權擥)이 수정?보완하다가 끝마치지 못하였는데 권제의 생질인 서거정(徐居正)이 상주판관 박원창(朴元昌), 대구부사 최호원(崔灝元)의 도움으로 완성시켜 경상감사 윤호(尹壕)를 시켜 안동부에서 간행하게 한 것이다. 한 가문의 족보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많은 타성들, 지방관들이 참여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 서거정이야 생질이라 여기 참여하는 이유가 분명하지만 다른 지방관들의 성격은 어떠한지는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 노릇이라고 하겠다.
이 안동권씨 세보는 뒤에 나오는 족보들과는 다른 특성을 갖는다. 특히 여계 혈손을 기록하는 방식은 뒤의 족보들과는 아주 다른데, 이것은 성화보 시대의 문화가 아직 남성혈손 중심의 구도를 갖추어내기 전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족보, 시조, 재사 등으로 특징되는 문화적 암호들이 아직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기 전이라는 점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모든 문화는 시대의 특성을 자신의 특성으로 갖는다. 족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15세기의 족보와 16세기의 족보, 17세기의 족보는 기록양식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족보가 그 문화가 처음 등장한 이후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거듭거듭 중간된 것이고, 또 모든 가문의 족보가 한 시기에 다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적 차이를 갖고 만들어진다는 점 등은 족보를 통해 시대의 특징을 두루 살펴볼 수 있으리라는 점을 알게 한다. 족보는 문화사회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풍부하게 갖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에 안동권씨 세보는 능동재사에서 다시 판각된다. 그것은 아마도 20세기 중반까지가 우리 전통시대와 문화사적 친연관계를 맺고 있는 시기였다는 점을 증거하여 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안동권씨 세보는 오늘날에는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하였다. 족보문화에 관한한 안동 권문이 옛날에도 그러하였지만 오늘날에도 앞서가는 문중에 속한다는 알려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조선 후기 유학문화는 족보를 먼저 출현시키고, 그 후에 가문의식을 점차 강화시켜 나가며, 그 연장선상에서 시조에 대한 문화적 관념, 문중의 시조나 중시조를 문중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제향하는 의식 등이 차례로 갖추어져 나가기에 이른 것이라고 하겠다. 안동권씨 세보의 등장시기인 1476년, 시조 권행의 실전되었던 묘소를 찾았다는 1470년대, 능동재사가 건설되는 1653년 등의 시간표는 이러한 문화적 전개양상에 관한 일정한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동권문의 경우는 족보의 성립년대, 시조묘소를 다시 찾는 시기, 시조를 제향하는 능동재사의 성립시기 등이 분명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제 양상들 사이의 시기적 상관관계를 짚어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다른 가문의 경우는 시기가 불분명한 자료가 많이 있다. 따라서 안동권문의 자료만을 가지고 이러한 문화적 양상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명하게 말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르는 일임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를테면 영양남씨의 경우, 통상 재사의 성립시기는 16세기라고 말하여지는데 족보나 시조묘단의 등장은 그 뒤에 이루어진다. 이러한 것들은 안동권씨의 경우와는 아주 다르다. 이러한 차이들을 포함하여 우리가 이러한 문화양상에 대해 어떠한 일반화에 도달할 수 있을런지는 시간을 두고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덧붙여서 우리가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것은 1423년의 문화유씨 족보, 1454년의 남양홍씨 족보 등, 안동권씨 세보 이전에 출간된 족보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왜 사라져 갔고 오늘날 안동권씨 세보가 현전하는 최고의 족보가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점을 단지 뒤에 중간된 족보 때문에 전날의 족보가 사라져 가 없어졌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안동권문의 능동재사 앞에 서면 이러한 상념들이 우리의 의식을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그러한 연상작용의 첫머리에는 아마도 성화보의 권능이 놓여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