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120개국 떠돈 여행가이자 만화가 조주청씨(글/박명옥)

종로구 삼청동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꼽힌다. 세종로에서 경복궁을 왼편으로 끼고 접어드는 삼청동길은 화랑가. 갤러리가 줄지어 서있어 화가들을 비롯한 예술가들의 발길이 잦다. 도심의 번화가가 아닌 까닭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일부러 찾아가기 어려운 곳이지만 경복궁과 한옥의 전통미, 갤러리와 카페의 현대미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보기드문 곳이다.

산과 물이 맑고,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 삼청(三淸)이라 이름지어졌다는 이곳 삼청동에 조주청씨의 작업실이 있었다. 청청공방(淸淸工房). 붉은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건물의 맨 꼭대기층에 자리한 공방에 들어서자 높지 않은 천정 아래로 아치형 유리창이 멋스럽다. 청청공방은 건물을 지은 건축가이자 시인인 김기석씨가 손수 지어준 이름. '삼청동에 조주청'이라는 의미에서 지명과 이름의 청자를 하나씩 따왔다는 설명이다.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응접실은 120개 나라를 다녔다는 조주청씨의 다양한 여행경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낮은 천정과 어두운 조명으로 아늑하게 느껴지는 그곳은 벽과 천정이 온통 진기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벽에 걸린 표범과 악어가죽, 동물의 뼈와 뿔, 토속적인 문양의 갖가지 크고 작은 장신구들, 다양한 나라의 주화가 깔린 테이블….

"좀 귀신스럽지요?" 눈앞의 신기한 것들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조주청씨가 들어왔다. 반백의 짧게 자른 머리, 둥근테 안경, 점퍼와 캐주얼화 차림은 여행할 때의 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여행가, 만화가, 맛칼럼니스트. 조주청씨를 따라다니는 직함은 그의 이력만큼이나 다양하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뛰쳐나와 이후 건축일도 하고, 호텔을 지어 경영하는 등 사업을 하다 결국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전국의 산간오지와 도서벽지를 다니며 여행기를 썼다. 1985년부터는 해외로 눈을 돌려 17년 동안 120여개국을 여행하며 많은 신문과 잡지에 여행기와 만화를 연재해오고 있다.

여행은 우선 떠나고 보는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김영사에서 발간할 단행본 작업과 며칠 후의 출국준비로 바쁜 조주청씨를 만난 것은 점심시간이었으므로 우리는 근처의 한정식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찬으로 밀가루부침이 나오자 한점 집어서 맛을 본 그는 "여기에 청양고추가 들어가야 제맛인데"라고 아쉬워한다.



사람의 입맛을 보면 출신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던가. 미각이 예민한 소년시절에 각인된 음식에 대한 기억이 평생을 가기 때문이다. 산촌 출신은 나물류에, 어촌 출신은 생선에 박식해지기 마련인데 조주청씨의 입맛은 어김없이 안동출신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는 봉화집을 비롯해 자주 다니는 안동 손칼국수집이 몇 곳 있는데 분주할 때가 아니었다면 거기서 식사를 해도 좋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안동의 맛을 그대로 내는 곳은 찾기 힘들다고.


"콩가루국수를 밀 때는 밀가루와 콩가루의 비율을 4대 6 정도로 해야지요. 무엇보다 안동 손칼국수의 핵심은 배추에 있지요. 노랗게 익은 배추속잎을 넣어야 제맛이 나는데 서울에서 그렇게 하는 집은 없더군요. 안동에서는 도람이네가 그런 맛을 냈지요."


기자는 언젠가 안동에서 꽤 알려진 손칼국수집을 취재갔을 때 큰 도마위에 가득 썰어놓은 노란 배추속잎을 본 적이 있다. 배추겉잎은 조밥과 함께 푸성귀로 내고 노란 속잎은 국수에 넣는다는 주인장의 설명도 들었다. 배추를 넣어야 국수의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는 주인장의 말과 조주청씨의 견해가 어찌 그리 같은가.


 


  그는 시래기국도 좋아한다고 했다. 안동에서 콩가루를 입힌 시래기에 소금간으로 담백하게 먹는 시래기국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종합병원 의사인 부인을 대신해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그 요리법을 가르쳐 즐겨먹는다고 한다. 식도락가로 신문과 잡지에 맛칼럼을 연재해오기도 한 맛칼럼니스트인 그의 안동음식에 대한 향수가 점심을 먹는 중이었음에도 안동손국수와 시래기국 생각에 입맛을 다시게 했다.


  그는 안동시 운안동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5남매 중 둘째로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며, 어린시절부터 처음 접하는  낯선 풍습에 남다른 호기심을 품었다고 한다. 중학시절,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의 전기를 읽고,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와 테사무 오츠카의 『밀림의 왕자』라고 하는 16권 분량의 대하물을 읽으며 모험가로서의 꿈을 키웠다는 그는 대학진학을 위해 서울로 온 이후 시외버스를 타고 외곽으로 나가 모심기를 돕거나 시골장을 구경하는 등 이것저것 기웃거리기를 즐겨했다.



그랬던 그가 대기업에서 일하다 사업도 해보다 결국 여행가가 된 것은 타고난 역마살과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잡지에 기고하기 위해 전기가 들지 않는 산간벽지를 다녔다. 마라도의 마라분교와 청학동의 청학서당 등 시골의 분교를 다니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 것이다. 그러다 전기와 함께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해외로 나섰다.



"사람을 만나 인정을 맛보는 게 여행이지요. 어느 집에서 옥수수를 꺾으면 같이 꺾고 같이 삶아먹고 하루밤 신세도 지는 거지요. 관광이 산수 좋은 곳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여행은 사람, 즉 인정을 찾아가는 겁니다."


산이 좋고 물이 좋다고 해도 사람사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지론을 펼치는 그는 해외에서도 유명관광지 대신 오지를 찾아다녔다. 남태평양의 섬들, 카리브해의 국가와 중앙아메리카, 남미와 아프리카, 중동과 아시아의 오지, 유럽중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북구의 나라들을 여행하며 그곳의 순박한 토착민들과 어울린 것이다.



여행지의 분위기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 한번 출국하면 한 달은 지나야 돌아오고 일년에 수십차례 여행을 떠나는 그는 오지를 여행하면서 위험한 경우도 많이 당했다. 서부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는 세네갈에서 정변을 겪기도 하고, 고산지대인 티벳에서는 식욕을 잃고 호흡곤란 증세를 겪는 고산병을 앓기도 했다. 서인도제도의 아이티에서는 내전이 일어나는 통에 게릴라에게 붙잡히는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다음엔 다시 여장을 꾸려 떠났던 사람이 조주청씨였다.


그는 여행은 우선 떠나고 보는 ‘용기’가 필요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늘 여행을 꿈꾸면서도 시간과 돈을 이유로 쉬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용기를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편안하게 안주해있던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주변에 얽매이지 않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용기. 대기업에 몸담았던 그가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결국 여행가로 나선 것도 그렇게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용기와 무관해보이지 않았다.

어릴때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 만화로 표현 [오입쟁이,사기꾼, 그리고 수전노]

여행가라는 직업도 평범하지 않은데 본업은 만화가라고 불려질 정도로 만화 분야의 경력도 적지 않다. 조주청씨가 만화를 시작한 계기는 80년대 초 월간지 산에 독자투고 만화를 보낸 것이 뽑히면서다. 이후 여러 잡지와 신문에 만화와 만평을 게재해왔는데 여행기와 함께 많게는 한달에 40편 정도의 작업을 진행했다. 현재도 게재해오고 있는 신동아의 경제만평은 100회를 넘어 최장수 코너가 됐을 정도. 그런 그가 지난해 만화단행본도 한권 출간했다. 만화로 보는 선인들의 지혜와 해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오입쟁이, 사기꾼, 그리고 수전노』가 그것.



"만화책은 한 7, 8년만에 낸 겁니다. 그 동안은 『지구떠돌이 조주청, 함께 뒹굴며 120나라』, 『지구촌 성문화 기행』등 여행기에 주력했지요.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옛날 이야기를 꼭 한 번 만화로 표현해야지 했는데 좀 늦어졌습니다."


영악스런 사기꾼, 점잔빼는 훈장, 착한 효자, 음흉한 부자, 촐랑대는 이방, 음탕한 과부 등이 등장하는 70가지 해학을 다룬 이 책은 조주청씨가 안동출신이라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중학교 시절 할머니로부터 선조들의 지혜와 해학을 들었던 그는 어떻게든 표현해보고자 당시에 벌써 서투르게나마 10쪽 짜리 만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구전되어온 이야기가 재미있기도 했겠지만 학창시절 미술반 활동을 했던 만큼 손재주가 있었던 덕분에 급우들 사이에 종이가 너덜너절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우리 조상들의 유머와 해학, 그리고 절묘한 스토리와 반전은 다른 어느 나라 것보다 월등합니다. 그리고 책속에 등장하는 사기꾼이나 수전노는 비판받아야 할 악인이라기보다 쓴웃음을 짓게 하는 귀여운(?) 악당들이지요. 모두 우리 이웃의 모습 아닙니까."


책 속에 등장하는 온갖 인간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는 여행가다운 따뜻함이 묻어난다. 그래서인지 거친 듯 하면서도 풍부한 표정의 캐릭터가 웃음을 자아내고 토속적이고 정감있는 그림이 구수하다는 게 독자들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조주청씨는 한 골프월간지에 세계 여러나라를 다니며 경험한 골프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골프지에서 일해온 기자에게 전혀 낯선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안동 태생이라는 것은 미쳐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유교의 본고장, 예향으로 불리는 안동출신 인사라고 하면 으레 학자와 관료를 떠올리던 터에 만화가, 여행가라는 직업은 뜻밖이기만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서 지구촌 곳곳의 토착민들과 어울렸듯 여행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낯선 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용, 세상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과 따뜻한 배려는 학문이 인간에게 가르치는 겸양의 자세와 다를 게 무엇이랴.


마지막으로 120개국을 여행하며 가장 기억나는 여행지가 어디였느냐고 묻자 조주청씨는 남미 안데슨 산맥의 중심부에 있는 페루를 꼽았다. 티티카카 호수의 아마타니섬에 살고있는 몽골계의 인디오들에게서 과거의 우리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는 설명은 자못 흥미롭게 들렸다.


"초가지붕을 얹은 흙벽돌집에 사립문이 달렸고 처막 끝에는 개가 자고 있더군요. 마당에는 멍석에 옥수수가 널려있어서 야∼, 내 어릴 적하고 똑같네 생각했지요. 흙벽은 억새풀과 흙을 이겨서 발랐고 화장실에 화장지 귀하던 시절 우리처럼 헌 신문과 잡지가 있었습니다. 문을 다는 대신 가마니 떼기로 가려놓은 것도 우리네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인디오들이 전혀 낯설지 않아 고향에 온 것 같은 푸근함을 느꼈다는 그는 어디서건 시골풍경을 접하면 타임머신을 타고 어릴 적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일년에 몇 차례씩 안동을 다녀갈 때마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이미지가 퇴색되어 실망하게 된다는 그에게 여행은 마음의 고향을 찾아떠나는 행복한 방랑이 아니었을까. 문명이 발달되어 갈수록 사람은 점점 멀어지는 현대를 살며 가난하고 거친 땅의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맛보러가는 또 다른 고향찾기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삼청동의 조주청씨는 또 어딘가로 떠날 봇짐을 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안동]


 



-----------------------------------------------------------------------조주청씨는 1945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했다. 120개국 오지여행, 월간 조선 경제만평, 그 외 열두어개 신문잡지에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지구촌 성문화 기행』(1996),『지구 떠돌이 조주청, 함께 뒹굴며 108나라』(2000),『오입쟁이 사기꾼 그리고 수전노』(2000)가 있으며 현재 김용사가 출간하는 여행기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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