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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을 흐뭇하게 만든 작은 소녀 안동여고 김은정(글/서성훈)

우리들은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가 명예를 드높인 일을 들어 그-또는 그들-와 같은 구성원임을 자부하며 전체가 뿌듯해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주로 경연대회나 스포츠대회 등을 통해 느끼게 되는데, 크게는 오래 전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이나 2002년 국가대표 축구팀의 월드컵 4강이 우리민족에게 그러했고, 작게는 유명인과 동기동창이거나 또는 그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런 기분을 느끼곤 한다. 이처럼 타인으로 인해 내가 뿌듯해지는 일. 누군가에 의해 내가 안동사람임이 흐뭇해 졌던 일이 얼마 전 있었으니, 바로 안동여고 2학년 김은정양이 그 주인공이다.
요즈음 방영되는 TV프로그램 중에 ‘도전 골든벨’이라는 코너가 있다. 청소년들의 끼와 재능을 겨루는 프로그램으로 상술과 저질, 엽기로 얼룩진 TV매체의 홍수 속에서 그나마 온가족이 둘러앉아 즐기면서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건전프로 중 하나이다.
1999년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7년 동안 매주 100명씩 총 29,900명의 학생이 도전하여 그중 단 51명만이 골든벨을 울렸다. 그러다 보니 골든벨을 울렸다는 것은 그 학생 개인의 영광을 넘어 학교의 자랑이자 그 지역의 자부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도전 골든벨’이 얼마 전 300회 기념으로 특집 방송을 하였다. 이전의 한개 학교를 찾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반대로 전국 100개 학교 대표 한명씩을 청와대로 불러 학교의 최고가 아닌 명실공이 전국의 최고를 가리는 그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안동여고 김은정양이 전국의 내로라하는 명문고의 학생들을 제쳐두고 당당히 52번째 골든벨의 주인공이 되었다.
은정양을 만나기 위해 안동여고 교정을 찾았다. 수업을 마친 저녁시간이지만 대한민국의 여느 고등학교가 그러하듯이 하교하는 학생은 눈에 띄지 않고, 다들 저녁 야간자율학습 준비에 분주하다. 10여 년 전 내가 그러했듯, 30여 년 전 우리 부모님들이 그러하였듯, 입시에 갇혀 버린 이 땅의 젊은 청춘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하루빨리 이 땅에 강제된 주입식 교육이 사라져 이들에게 꿈과 희망이라는 자율의 날개를 달아 주면 좋으련만…….

여느 여고생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은정양이 다가온다. 안동여고의 상징인 파란색 교복과 여고생의 겨울패션 상징인 치마 안 바지체육복. 이제는 인기인(?)이 되어 자기 멋을 내도 좋으련만 은정양의 지극한 여고생다움에 코웃음이 나온다.
“반가워요. 전화했던 서성훈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은정이에요…….”
인사하는 폼이 약간은 어색한 듯, 약간은 귀찮다는 듯 한 것이 마치 맘에 들지 않은 옷을 걸쳐 입은 어린아이 마냥 부자연스럽다. 한 순간에 유명인(?)이 되고 이곳저곳의 인터뷰에 응하다 보니 공부에 방해되는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자연스레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인 게다. 이 또한 자신을 속일 줄 모르는 10대의 자연스러움 아니겠는가. 맘에 들지 않는 옷을 권한 나. 조금은 미안해진다.

미안함에 보답도 할 겸 저녁식사를 권했더니 삼겹살이 먹고 싶단다. 여고생이라 내 맘속으로 생각했던 메뉴는 햄버거, 피자, 스파게티였다. 그런데 삼겹살이라니……. 삼겹살은 첨 만난 사람과 대화하며 식사하기엔 그리 편한 음식이 아니다. 기름도 튀고, 쌈을 싸면 입도 크게 벌려야 되고, 거기에 마늘이라도 하나 먹을라 치면 그 고약한 냄새는 어찌한단 말인가. 인터뷰는 대화인데……. 잘 아는 고깃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나는 한걱정인데 은정양은 처음 봤을 때의 어색함이 한결 풀어진 모양이다.
‘그래 까짓 거 가자. 내가 언제부터 기성세대 마냥 이것저것 재고 대어보고 했단 말인가. 오늘은 여고생과의 인터뷰. 나도 10대처럼 편하게 행동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도 한결 맘이 편하다.
각자 한입 가득 상추쌈을 먹으며 질문을 던져본다.
“골든벨을 울리고 나니 기분이 어때요?”
“얼떨떨해요. 정말 내가 했는가 싶기도 하고, 꿈같고 그래요.”
쑥스러운 듯 웃는다.
“누가 제일 기뻐하시던가요?”
“할아버지요. 이제는 돌아가셔도 여한이 없으시데요.”
같이 웃다가 쌈이 삐져나올 뻔 했다.
은정양이 골든벨을 나가게 된 계기도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한다. 중학교 시절부터 공부를 곧잘 했던 은정양을 보고 할아버지는 언제나 ‘은정아! 니 저기 한번 나가봐라.’하고 말씀하셨단다.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오면 나가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 기회가 왔고, 교내에서 신청을 받기에 지원을 했더니 다행히 선생님도 추천해주시고 해서 나갈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모습에서도 느끼던 바이지만 은정양은 가식이 없었다. 그런 은정이가 해주는 이야기에서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깊은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이런 손녀를 둔 할아버지, 얼마나 행복하실까. 모르긴 몰라도 그날 노인정의 탁주값은 은정이 할아버지 몫이었을 게다.
“진행되는 동안 떨리거나, 주눅 들지 않았어요? 외고나 과고 같은 특목고 학생들도 많았다고 하던데…….”
“사실 당일 날 기가 많이 꺾여 있었어요.”
녹화 전날 리허설을 했었더란다. 그때 각 학교별로 자리배정할 때 학교명을 호명하는데 거기서 기가 죽었단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특목고가 수두룩했고, 진행하는 방송국에서도 자기 같은 지방학교 학생들은 별로 신경써주지도 않더란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그 보다는 스스로도 기가 죽어 있음을 느꼈단다.
동행하신 선생님도 “은정아! 괜찮아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씀 해주셨다 하니 아마 선생님도 내심 별 기대는 못하셨던 모양이다.
“언제 쯤 내가 골든벨을 울릴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사실 전 9번 문제에서 떨어졌었어요. 그러다가 패자부활전으로 다시 살아나 끝까지 간 거예요. 그러니 내가 최후의 1인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한 문제 한 문제 풀다보니 어느새 나를 포함해 네 명밖에 없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솔직히 조금 욕심히 생기던데요.”
당차게 얘기한 것과는 달리 부끄러운 듯 미소 짓는다.
9번 문제는 동요 ‘봄’의 가사를 맞추는 문제였다고 한다. ‘엄마 엄마 이리와~’로 시작하는 이 노래에서 ‘병아리 떼 뿅뿅뿅뿅 울고 간 뒤에 OOO 파란싹이 돋아 났어요~’의 한 단어를 맞추는 문제였는데, 너무도 익숙하니 개나리를 적었단다. 기실 나도 개나리라 생각했었다. 정답은 ‘미나리’란다. ‘이 노래에 미나리가 나올 줄이야! 나도 9번에서 ‘땡’이었겠구나.’ 싶다.
그렇게 허무하게 떨어지고 나니 제 실력을 발휘도 못해 본게 억울했단다.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시골학교라고 주눅까지 들었는데 제 실력도 발휘 못하고 떨어졌으니 그 분함이 오죽 했겠는가.

20번 문제부터 패자부활전으로 살아나서는 마음을 비우고 덤덤하게 풀었단다. 25번 문제부터는 일주일전에 담임선생님이 그래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이니 공부하라며 권해준 상식이 담긴 참고서 한권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42번 문제부터 혼자 남게 된 은정이는 더욱 더 침착해 질 수 있었단다. 최후의 1인이 되었으니 이만하면 됐다 싶어 욕심을 비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50번 골든벨 문제는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그 주인공을 연결하는 문제였다. 정답을 맞힌 은정이였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물어봤다.
“혹시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다 읽어 봤어요?”
“네. 다 읽어 봤어요.”
나는 아직 한권도 못 읽어봤는데……. 질문한 내 입이 부끄럽다.
어느덧 저녁도 다 먹었고, 마지막 질문을 던져 봤다.
“지면을 통해 고마움을 전할 분은 없나요?”
“우선 당연히 할아버지고요. 그 다음이 사랑하는 우리 부모님. 그리고 절 너무나 아껴주시는 여전상 담임선생님이요. 절 골든벨에 나가게 하신 분이 할아버지라면, 골든벨이 울리도록 해주신 분은 선생님이세요.”
마음이 깊은 아이. 고마워 할 줄 아는 아이. 그리고 그 마음을 전할 줄 아는 아이. 바로 은정양이다. 요즘 청소년들 버릇없다, 공부 안한다, 하지만 은정이를 보노라면 그건 어른들의 섣부른 편견이 아닌가 싶다.
이 기사를 작성하는 날은 경상북도의 혁신도시 선정지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우리 안동은 상주, 김천 등지와 경합을 벌이다 아깝게 고배를 마셨다. 낙후된 경북북부지역이라는 상투적인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심 내 고장 발전을 위해 안동에 유치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35년 전 그러니까 1971년 전라남도 신안군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그 해에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격돌한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그 선거에서 아깝게 김대중 후보가 낙선하게 되었다. 신안군은 김대중 후보의 고향이었고 따라서 많은 신안군 주민들이 낙담하게 되었는데, 한 고등학생의 학력고사 전국 차석, 서울대 전체 수석의 소식에 낙담했던 자부심도 새로워지게 되고, 희망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고등학생은 35년 뒤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이 되었으며 여당의 대선후보로까지 거명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천정배다.
오늘 우리 안동에 낙담하는 일이 생겨 다들 허탈해 하고 있다면, 은정이와 같은 인재가 있으니 우리에겐 미래가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이런 젊은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갈 때 우리 안동인의 자부심과 자신감은 오래도록 계속 될 것이기 때문이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