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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농민회 회장 임극호씨(글/사진/서성훈 - 안동문화연구회 사무국장)

쌀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지키는 것이다 - 천상 농꾼 임극호씨. 며칠 전 오랜만에 눈다운 눈이 한바탕 신나게 내리고 나더니 잠잠하던 동장군이 다시 기승을 부린다. 소한, 대한 다 지나고 이제 입춘마저도 지났건만 이대로는 곱게 물러날 수 없다는 기세다. 안동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때는 구체가 없다. 그저 뜨끈한 아랫묵에 궁디나 찌지고 들안잤는 수밖에는...' 예로부터 겨울은 농한기라 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땀 흘려 일한 농민들이 몸을 아껴 내년 농사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그러니 이렇게 추운 날에는 땔감 구하는 것도 잠시 미뤄두고 이방 저방 삼삼오오 모여 감자나 고구마 등을 구워먹으며 따뜻한 아랫목에서 두런두런 정을 나누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그러나 올해 겨울. 농민들은 예년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겨울을 보낼 여력이 없다. 정부의 추곡수매제 폐지로 16만원을 호가하던 쌀값은 한순간에 12만 원대로 폭락하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설마설마 하던 쌀 수입은 본격화되기 시작한데다 한술 더 떠 소비자용으로까지 시판되게 생겼으니 어찌 편안한 마음으로 엉덩이나 지지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오늘 만나 볼 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농민단체인 전국농민회(일명 전농) 산하 안동시농민회의 임극호(43)회장이다. 작년 11월의 “쌀협상 비준동의안” 반대 시위 과정에서 농민 두 분이 돌아가시고, 홍콩에서 열린 WTO반대 시위에서는 여러 농민들이 현지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얼마 전에는 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2월3일부로 한국과 미국의 FTA협상이 공식 개시되었다. 요 몇 달 사이에 벌어진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연일 뉴스에서는 우리의 농업이 걱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난 구체적인 내용도 모른 채 그저 막연한 걱정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민족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데 값싼 수입쌀이 들어오면 우리 농민들은 몰락하게 되고 그러면 언젠가 식량이 무기화 되었을 때 결국 우리민족 전체에게 피해가 오게 된다. 하는 정도의 막연한 걱정인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국민들도 이정도 선에서의 걱정으로 우리 농업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생산한 많은 전자제품들을 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여기면서도 말이다.

차가운 겨울바람, 훈훈한 농촌 인심
임극호 회장의 집은 임하면 금소리이다. 몇 달 전 금속공예가 김기덕씨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금소마을은 황금빛 가을 풍경으로 고즈넉하기 그지없었건만, 오늘은 마음이 무거워서 일까. 차가운 겨울바람이 더욱 더 매섭게 느껴진다.
“아이구, 어서 드오이소. 집 찾느라고 안 힘들었니껴? 마이 춥죠.” 대답할 틈도 없이 여러 인사를 한꺼번에 건네는 주인장이다. 날이 추우니 어서 모시기도 해야겠고, 인사도 건네야겠기에 이리 서두르시는 게다. 주말 오후 오붓한 가족만의 시간을 방해한 불청객이건만 환한 미소로 맞아주신다.
우리의 농업이 백척간두의 기로에 서있다 할지라도 훈훈한 농촌의 인심만은 아직 살아 있음을 느껴본다.
안주인께서 내어주는 다과상을 마주하고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농민회 활동은 언제부터 하신건가요?”
“92년인가? 3년인가? 전국적으로 고추파동이 일났딘데. 그땐 나도 농사를 짓고 있었디래요. 군청에 항의 시위하러 갔다가 그게 계기가 되가꼬 지금까지 이러고 있니더.”
세상물정 모르는 농사꾼처럼 보이려는 듯 걸쭉한 안동사투리로 그냥 세월에 휩쓸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무지렁이 농사꾼이 아니다. 시골에서 대학 다니기가 그렇게 녹녹치 않던 80년대 초반에 4년제 대학까지 다니던 엘리트 농사꾼이다. 학창시절 뜻하는 바가 있어 학업을 접고 그가 나고 자란 고향, 이곳 금소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쌀은 우리에게 자존심. 문화와 함께 지켜져야 할 것
이런 저런 담소로 자리가 편안해 졌을 즈음 평소 궁금해 하던 질문을 해봤다.
“95년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지난 10년간을 돌아보면 ‘농사는 경제성이 없어질 것이고 쌀을 비롯한 농산물의 수입은 불가피 한 것이다.’ 라는 대한 얘기는 계속 나왔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이 문제들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는데요. 그렇다면 저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은 왜 농민들이 진작부터 예견되었던 일에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들고 일어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또한 정부가 이번 비준안을 통과시키면서 농민들에 대한 대책안을 마련하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농민단체에서는 그렇게 강력하게 반대하는 지를 저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할말이 많으신 듯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는 한숨 같은 긴 연기를 내 뿜으며, 얘기를 꺼내 놓으신다.
“그 문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쌀이 우리 민족에게 갖는 문화적인 성격을 고려해야 하구요. 또 다른 하나는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입니다.”
회장님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그리 간단하고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쌀은 단순히 생각하면 여러 먹거리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우리 민족에게 쌀은 그냥 단순한 먹거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쌀을 단순한 먹거리로만 생각한다면 ‘쌀밥이 없으면 빵이나, 햄버거, 고기를 대신 먹으면 된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 절대 다수는 쌀밥을 먹지 못하고 평생 빵이나 고기로 끼니를 때워야 한다고 하면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민족이 쌀에게서 느끼는 특별한 문화적 특징인 것이지요.”
듣고 보니 그러하다. 쌀밥 대신 빵이나 고기를 주식으로 하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속이 거북한 일이 아닌가. 역시 쌀은 우리에게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이다.
“프랑스가 미국과 WTO협상을 할 때 절대 손댈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시작한 것이 문화산업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화산업이죠. 후배도(나는 그의 대학 10년 후배이다.) 매체를 통해 많이 봐서 알겠지만, 프랑스 영화라는 게 사실 예술적인 가치는 높을지 몰라도 흥행 면에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거든요. 그런데도 프랑스 사람들은 끝까지 자국영화산업을 지키는데 성공하죠. 그렇다면 돈도 안 되는걸 끝까지 지킨 프랑스 사람들은 바보입니까? 아니죠. 그건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인 거죠. 마찬가지로 쌀도 우리에겐 자존심입니다.”
세계인들은 프랑스 하면 문화와 예술을 떠올린다. 이런 칭송을 들어온 프랑스인들의 자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때 유럽문화를 선도하던 자국의 문화가 돈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식민지문화(미국)에 잠식당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기고 결코 자국의 문화산업을 흥정의 꺼리로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반해 경쟁력이 좀 생겼다고 단번에 문을 열어버리는 우리 정부의 스크린쿼터제 축소. 씁쓸한 생각이 든다.

“또 하나는 정부의 역할입니다. 지금까지 5공, 6공,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많은 농업 지원책들이 나왔었어요. 그런데 그 지원책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가관입니다. 농사라는 것은 기후와 토양 즉, 지역적인 영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전라도 농사 다르고, 경상도 농사 다르고, 강원도 농사 다른거죠. 헌데 어디나 일률적이고 근시안적인 농정이에요. 예를 들어 5공 때는 농가 수입증대 차원에서 소를 키우도록 장려했지요.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소를 사다 키웠는데, 소 다 키워서 팔 때 되니까 미국 압력에 굴복해 소고기를 수입했지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LA갈비가 그거 아닙니까. 문민정부 때는 또 어땠어요. 농업선진화다 어쩐다 하면서 외국에서 돈이 되니 우리도 될 것이라고 화훼농사를 장려해서 너도나도 유리온실을 짓고 했더니 IMF와서 기름값 폭등했지요. 그러니 정부 믿고 따라간 사람들은 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겁니다.”
나는 농민들이 시위하면서 외치는 구호 중에 제일 이해 안 되는 것이 ‘농가부채탕감’이였다. 아니 왜 빚은 자기들이 져놓고 정부에게 빚 갚아 달라고 외치는 걸까. 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구호가 결코 염치없는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농사꾼은 땅을 가꾸고 수확하는 것 밖에 모릅니다. 그런 농사꾼들에게 경영과 판로까지 기대한다는 것은 솔직히 무리입니다. 우리 농사꾼들은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수입이 괜찮더라.’라는 얘기가 나오도록 만 해주면 되는 거예요. 헌데 요새 우리끼리 하는 우스갯소리가 ‘정부에서 시키는 것만 안하면 망하지는 않는다.’예요.”
뿌연 담배연기를 길게 내 뿜으며 씁쓸하게 웃으신다.
“어느 높은 공무원이 그랬다고 하더군요. 1등 농민이 되라고요. 작물을 특화하고, 경영을 잘해서 돈이 되는 농사를 지으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죠. 아니 시골에 자기 힘으로는 경운기도 끌까 말까 하는 노인들만 그득한데 무슨 1등 농민을 합니까. 정책을 입안한다는 사람들이 그래요 글쎄. 그렇게 농촌의 현실을 모른다니까요.”

해로운 농사가 돈 되는 현실, 가슴 아플 따름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예전만큼 상쾌하지가 않다.
내 고향은 영주시 평은면으로 아버지는 지금도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다. 담배농사를 주 작물로 하시는데, 담배는 전매청(현 KT&G)에서 계약재배로 전량 수매를 하기 때문에 힘은 들지만 농사 중에서 가장 수익이 안정적이라고 하셨다.
언젠가 일손을 돕기 위해 따라나선 담배밭에서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있다.
‘농사란 예부터 천하의 근본이라 하여,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보람 있는 일이라 했건만, 어찌된 게 지금은 사람에게 해로운 담배농사를 지어야 돈이 되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구나.’
우리는 가끔 너무 풍족하여 그 소중함을 모를 때가 있다. 그리고 돈에 눈이 멀어 소중한 가치를 잊어버릴 때도 있다. 배고픔을 모르고 살아가는 2006년의 우리에게 쌀과 농촌이 그런 것이 아닐까. 쌀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지키는 것이라는 임극호 회장님의 마지막 당부가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