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사랑을 전하는 사람, 수화통역센터 이재섭씨(글/이미홍)기차역 앞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기차를 타고 어딘가를 향해 가는 사람들, 그리고 기적 소리와 함께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떠나보내거나 혹은 마중하러 나오는 사람들로 기차역은 하루에도 몇번씩 채워졌다가 비워졌다가 한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번씩 북새통을 떠는 곳이건만, 가끔 약속이 있어 기차역 앞에 서 있노라면 어쩐지 텅 빈 것처럼 느껴지곤 하는 역광장이었었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지는 나른한 가을날 오후, 역광장 벤치에 앉아 있노라면 넝쿨 나무 사이로 비추이던 햇살들, 기다리는 사람이 쉬 오지 않으면 나는 우두커니 그 곳에 앉아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과 방금 도착한 기차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역광장을 가로질러 신호등을 건너 어느새 시내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봤었다.
그 무렵 나는 꽤 많은 시간을 기차역 앞에 서 있거나 혹은 앉아 있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나는 역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지 못했다. 그저 그곳은 내게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만나기 위한 역앞이었을 뿐이었다. 역 앞에 둥지를 틀고 있는 이재섭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재섭씨를 만나면서 나는 그곳에 장애인들이 힘겹게 얻어낸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금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역전 파출소 앞 신호등을 건너 왼쪽으로 몇 발자국만 걸으면 보이는 모퉁이 돌아 바로 그 곳에 그를 만나기로 한 경북장애인협회 사무실이 있었다. 파란색 글자로 이름이 이렇게나 선명하게 새겨진 사무실이 이 곳 1층에 이렇게 길가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있었는데도, 여지껏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곳에 유명한 패스트푸드점이나 할인매장 같은 게 있었더라면 아마도 사정은 많이 달랐을거라는 생각에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려서 혼이 났다.
경북농아인협회 안동시지부장을 맡고 있다는 이재섭(37)씨는 일요일 오후, 그렇게 길가로 향한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보수 명예직 소장님
일요일인데도 일부러 문을 열어 놓은 사무실에는 이재섭씨 외에도 수화통역사 이문호(29)씨와 사무실 열쇠를 맡고 있는 사회복지사 김소영(24)씨가 나와 있었다. 취재를 위해 재섭씨를 마주보는 자리에 대충 자리잡고 앉으려는데, 통역을 맡은 문호씨와 지부장 재섭씨가 자리 배치에 나름대로 신경들을 쓴다. 문호씨의 통역 때문이었다. 그리고 말은 안했지만, 취재를 하는 우리를 위한 재섭씨의 배려이기도 했다.
덕분에 가벼운 소란은 있었지만,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입장이 바뀌어 재섭씨가 취재를 간 우리의 어색함을 풀어준 셈이었다. 그 편안함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긴장이 되는 기분이랄까?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참 세심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과연 그랬다. 농아인협회 지부 일도, 새로 맡은 수화통역센터 일도 무엇하나 빠뜨리는 법이 없는 소장님 덕분에 쉴 틈이 없다는 문호씨와 소영씨였다.
사실 우리가 그를 찾아가게 된 것은 수화통역센터 때문이었다. 올 봄, 안동에 수화통역센터가 새로 생겼다. 그리고 이곳 농아인협회 지부장인 재섭씨가 농아인들을 위한 수화통역센터 소장을 겸임하게 된 것이었다. 안그래도 바쁜 재섭씨의 일이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런데 수화통역센터가 농아인협회 부설 기관인데다가 소장은 보수가 없는 명예직이어서 일은 두 배, 세 배로 늘어난 반면에 예산은 적어서 힘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직접 현장에 나가서 통역을 해야 하는 일의 성격상 꼭 필요한 차량도 아직은 구입을 못한 상태이고, 장애인연합협회 사무실에 세들어 살고 있는데, 수화통역센터까지 생기면서 규모도 커지고 일도 많아져서 이제는 사무실도 따로 구해 나가야 할 형편이다. 예산이 많지 않은지라 형편에 맞는 곳을 여기저기 수소문해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예산도 예산이지만 농아인협회와 수화통역센터 사무실로 쓸 곳이라는 것을 알고도 기꺼이 사무실을 빌려줄 줄 아는 건물주를 만나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가 이내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성실하고 열심인 이들을 보고 누가 딴 소리를 할까 싶어서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이렇게 재섭씨와 직접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누구라도 금방 그의 선하고 맑은 눈빛에 동화되어 그가 장애가 있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가 하는 일을 도와주고 싶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살을 피우지도, 자기가 하는 일을 굳이 내세우지도 않고 어렵고 구차하다고 애써 숨기려고도 않는 그였다.
똘똘뭉친 수화통역센터 삼인방
서른 일곱 살, 어찌 보면 한 단체의 장을 맡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다. 그런데 그는 97년 경북 농아인협회 안동시지부가 생긴 이래로 지부 일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 왔다. 지부가 생길 당시 운영위원으로 지부 일을 돕게 되면서 시작된 인연은 무슨 일이든지 대충 하지 못하는 성실함 덕분(?)에 99년 2대 지부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몫이 되었고, 2년의 임기를 채우고도 연이어 지금까지 지부장 일을 맡고 있다. 그의 부지런함이 그의 일복을 불러온 셈이다.
지부장 일을 맡으면서 하던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그는 목수였다. 그것도 어렸을 때부터 화가를 꿈꾸었을만치 뛰어난 감각과 자타가 인정하는 특유의 꼼꼼함 덕분에 기능대회 입상 경력만도 한 두 번이 아닌, 벌이 좋은 잘나가는 목수였다. 그걸 지부장 일을 맡으면서 자의반타의반으로 그만두어야 했을 때 사실 그는 고민을 많이 했다. 당시만 해도 IMF로 여러 가지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때였기에 한 집안의 가장인 그로서 생업을 포기하다시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어렵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결코 쉽지 않았을 그 시간들을 누가 뭐래도 뒤돌아보지 않고 한 길로 열심히 걸어온 재섭씨였다.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하지 못한 협회 일은 시작부터 무엇 한 가지 녹록하지가 않았다. 사무실 임대료를 내지 못해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고, 형편이 어려운 늙으신 어머님께 사무실 전세비 천만원을 구해 달라고 떼를 쓰다시피 하기도 했다. 한때는 재섭씨 자신의 방한 칸을 사무실로 쓰기까지 하면서 그렇게 그는 협회 일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경북장애인연합회 사무실에 짐을 풀고 더부살이를 시작한 것이 작년인 2001년 10월부터이니 말하지 않아도 그간의 사정을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올 봄인 2002년 3월 2일, 그 동안의 재섭씨의 공이 하늘에 닿았는지 전국에서 두 번 째로 안동에 복지부에서 주관하고 정부에서 보조를 해주는 농아인들을 위한 수화통역센터가 농아인협회시지부 산하에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식구가 두 명 는 것이 재섭씨로서는 가장 반가운 일일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센터 직원인 사회복지사 소영씨나 수화통역사 문호씨가 재섭씨의 농아인협회 일을 도와주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지도 못할뿐더러, 영역 밖의 일을 남에게 도움을 청해 해결할 재섭씨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화통역센터 소장이기도 한 그이기도 하고, 또한 수화 통역 일이 어차피 농아인들을 위한 봉사이다 보니 두 가지 일이 서로 연결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서로 함께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 많아 이래 저래 재섭씨와 문호씨, 그리고 소영씨는 하나로 똘똘 뭉쳐 일을 해 나갈 수 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재섭씨와 현재 센터의 수화통역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문호씨의 관계는 더욱 특별하다. 그도 그럴 것이 농안인협회 일이나 수화 통역센터 일로 재섭씨가 가는 곳에는 통역을 위해 그림자처럼 문호씨가 따르기 마련이고,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센터 일만 하더라도 초기 단계부터 시청을 비롯하여 관공서를 드나들면서 서류를 작성하거나 관계자들을 만나 일을 추진해 가는 과정에서 문호씨가 단단히 한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반대로 아무래도 농아인들에 관련된 일로 통역을 하게 될 경우, 그들의 처지를 잘 아는 재섭씨가 동행하는 것이 문호씨로서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재섭씨가 든든하기는 수화를 의뢰한 사람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임은 물론이다.
문호씨가 아무리 수화 경력 12년의 베테랑 통역사라고 해도 농아인들 끼리만의 농식 수화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때도 있고, 영주 지역 농아인들을 위한 후원단체인 소리나눔일을 하며 현재 영주에서 출퇴근을 하는 그로서는 아직 재섭씨만큼은 안동 지역 농아인들의 현황에 대하여 파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둘은 자연 붙어 다닐 때가 많다. 달리 말하면 서로에 대해 그만큼 많은 것을 알게 되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또 두 사람이 무리 없이 한 몸처럼 움직이며 같이 일을 해 나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에 대한 신뢰나 존중이 크다는 뜻이기도 할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취재를 시작하면서부터 느낀 거지만 서로의 사정은 물론이고 취미나 버릇까지 훤히 꿰고 있는 듯한 세 사람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어째 재섭씨가 가장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재섭씨에 관해서라면 소영씨도 문호씨도 아는 게 많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재섭씨가 자칭 타칭 만능 재주꾼이고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데 가만 보니 칭찬이 먼저가 아니고 재섭씨가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면 두 사람이 그 증인을 서 주는 그런 형국이다.
자칭 타칭 만능 재주꾼
"제 꿈이 지부장 일 그만두면 돈 모아서 찌개 전문 식당을 하는 건데요. 제가 이래 봬도 요리는 잘 하거든요. 아내보다 제 요리 솜씨가 훨씬 나아요."
하고 결혼 2년째인 부인 강인숙(29)씨 흠집까지 내는 양하며 재섭씨가 짐짓 한 마디 하자,
"요리를 하기는 정말 잘 하세요. 소장님 집에 가거나 하면 손수 부침개며 라면이며 음식을 요리하셔서 대접하는 걸 좋아하시는데, 맛도 있고 좋아요."
라고 소영씨가 한 마디 거들고,
"요리면 요리, 가구면 가구, 만드는 일은 하여간 뭐든 잘해요. 벌써부터 이 일 그만두면 식당 개업한다고 계획을 다 세워두신 모양인데요, 아마 소장님은 식당하면 진짜 돈 많이 벌거예요. 근데, 소장님이 여기 일 그만두면 안되는데 어쩌죠?"
하고 문호씨가 재차 확인을 해 준다. 그 말을 받아서 금방,
"사실 형편이 되면 가구 공장도 하고 싶어요. 제가 시간이 없어서 안해서 그렇지 당장 내년이라도 기능대회 나가면 전 분야 1등도 자신 있어요."
하는 재섭씨,
"기능대회에서 공예 부문 금상까지 받은 1등 기능공이시거든요. 진짜 뚝딱뚝딱 순식간에 의자든 책상이든 잘도 만드세요. 저기 있는 의자도 소장님이 얼마 전에 만드신 거예요."
"하여튼 그런 쪽으로는 확실히 만능이에요.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싶으면 어느새 뭐 하나 뚝딱 만들어 내시니까요. 꼼꼼하고 부지런하시기도 하구요. 일을 할 때도 얼마나 세심한 데까지 신경을 쓰는지 순간순간 저희들이 놀라요."
라며 또 그 말을 금방 확인해 주는 두 사람, 어느새 한 식구가 다 되어서인지 호흡이 참 잘도 맞는다.
이렇게 호흡이 척척 맞으니 센터 일이 잘 되어 가지 않을 리가 없다. 아직은 초기 시작 단계라 솔직히 부족한 게 많다. 무엇보다 우리 지역에 살고 있는 청각장애인들과 농아인(대부분 청각장애가 있는 이들이 농아인이 된다)들에 대한 정확한 실태 파악 문제와 더불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의 성격상 홍보에도 어려움이 많이 따르는 게 사실이다. 수화 통역이 절실하게 필요하면서도 몰라서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이라는 건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관공서를 상대로 하는 각종 민원은 그렇다치고, 그렇지 않아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병원 갈 일이 오죽이나 많겠는가? 취직을 해서 밥벌이를 해결해야 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답답하고 애통한 일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그럴 때 문호씨 같은 사람들이 그 옆에 같이 서 있어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수화통역센터가 있는 이유이다.
문호씨도 재섭씨도 그걸 안다. 그래서 그네들은 지금의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 센터 일을 시작하게 된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문을 연 지 한 달 남짓, 몇 번의 통역과 한 두건의 취업 알선, 그리고 법적인 문제로 인한 근청인(일반인, 정확하게는 경찰)의 수화 통역 의뢰, 아직은 인원도 예산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렇게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청각 장애를 앓고 있는 많은 이들을 위한 소중한 한 걸음임을 믿기 때문이다.
농아인들을 위하여 좋은일 많이 하고 싶어요
"농아협회 지부 일을 보면서 솔직히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개인적으로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래도 봉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일했어요. 협회 일을 보면서 수화 통역의 필요성을 참 많이 느꼈었는데, 다행히도 안동에 이렇게 수화통역센터가 생기게 되고, 내가 그 일에 참여하게 되어 너무 고맙고, 농아분들을 위해 정말 잘된 일이죠. 수화 통역은 정말 귀중한 일이에요. 전문 일꾼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올 11월이면 임기가 끝나는 재섭씨의 끝나지 않을 꿈이자 바람이 담긴 말이다.
"개인적으로 돈 욕심이 있어서는 아니예요. 하지만 사람은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부 일을 맡을 때에는 제가 봉사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했어요. 그렇지만 가정을 이룬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해 일해서 돈도 벌어야죠. 지금은 아직 젊으니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나중에 그 돈으로 나와 같은 농아인들을 위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싶어요. 돈 많이 벌어서 꼭 그렇게 나누며 살고 싶어요."
말 끝에 그는 11월이면 나는 해방이라고 진담 반 농담 반 웃으며 두 팔을 벌려 보인다. 아무래도 결혼하자마자 고생만 시킨 아내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세상에 나올 아기에 대한 재섭씨의 마음이 시키는 몸짓이 아닐까 싶다. 5월이면 아기 아빠가 된다는 재섭씨의 꿈과 사랑이 어느새 깊어진 봄을 따라 해설피 녹아 들어간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