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 조동탁의 향리주실(글/조영일 - 시인)
거슬러 한25년 전쯤 KBS 안동방송국에 근무하던 김모PD가 자기 조상 중 한 분이 쓴 현판글씨를 보러가자는 말에 선뜻 동의를 하고 따라나선 것이 내가 주실을 찾은 첫걸음이었다. 6?25전쟁에 많은 고가들이 소실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즐비한 고택들의 규모가 영남의 명문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초당(草堂)이라고 쓴 현판을 보는 구실로 문중 장로의 안내를 받아 마을을 한바퀴 돌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지훈 생가에 이르러 쉽게 발길을 옮기지 못하면서, 새삼 떠올린 생각 하나는 오래전 서울의 문인들 모임에서 고향 근동 손님이라며 다가와 따스하게 손을 잡아주던 지훈 시인의 고모 조애영 여사의 단아한 모습이었고, 둘은 그의 추천작 ‘고풍의상’이나 ‘봉황수’에서 만나는 유장한 느낌이었다.
-모든 시관은 그 시인의 우주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시인의 우주관은 논리의 기초 위에 구조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직관 속에 체험되는 것이다.-
그의 시론 [시의 우주]에서의 머리글로 ‘체험’이라는 말과 함께 조부로부터 한문수학을 받고 영양보통학교를 다닌 유년시절의 숨결이 주실 여러 곳에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에 예사롭지 않는 마음으로 마을을 살펴본 그때의 기억이 새롭다. 지훈은 문학론에서 예술의 지방성을 논의하는 가운데 ‘고유성’ 또는 ‘순수성’의 의미가 내재해 있음을 강조했다.
20여 년 전 초행이후 여러 차례 주실을 드나든 뒤 오늘 다시 주실을 찾아오면서 영양을 지날 때 문득 그의 혜안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변화가 전혀 실감나지 않는 조용한 마을의 모습 안에 담겨진 진정성은 그것이 일상이거나 나아가 문화예술에서도 고유와 순수 이상 무엇이겠는가. 반변천의 발원지 일월산을 바라보면서 나는 새삼 전통이란 결국 하나의 개성이라는 그의 논조를 음미하는 감회에 젖었다.
그의 사후 5년 일지사에서 펴낸 조지훈 전집에 시편은 1, 2권으로 짜여져 있고 그가 내 시의 고향이라고 토로한 청록집에 실린 작품 12편이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의 추천작이자 대표작으로 가늠되는 ‘봉황수’를 위시해서 ‘고풍의상’, ‘승무’ 등이 유려한 맛을 뽐내고 있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半月(반월)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지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화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曲線(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초마 끝에 감춘 雲鞋(운혜) 唐鞋(당혜)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나라의 古典(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胡蝶(호접)
胡蝶이양 사푸시 춤을 추라 蛾眉(아미)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지어다.
「古風衣裳(고풍의상) 全文」
영락없이 주실 골기와 집 기둥에서 거처한 선비의 옷자락이 흔드는 여운이 베어나는 가락이며 운율의 전달이, 뛰어 일어나 춤을 추고 싶은 감흥으로 가쁘게 한다.
지훈 조동탁 그의 생애는 비록 48년이라는 짧은 세월에 불과하지만 지조를 중시하고 강직했던 선비의 풍모는 시와 학문 사상을 넘나들며 당대 제일의 지식인으로 당당했다. 약관 19세의 나이로 [문장]지 추천을 거쳐 동인지 [백지]를 발간하고, 이듬해 혜화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를 마친 뒤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 외전강사, 그리고 조선어학회의 큰 사전 편찬원을 거쳐 木月과 조우하기까지 20대 초반 그는 벌써 문학과 학문의 큰 기틀을 갖는다. 1963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아 펴낸 [한국문화사대계]는 시와 함께 그의 빛나는 업적이기도 하다.
문학의 현장을 살펴보자는 기획으로 시작한 글이 너무 멀리 빗나갔다.
안동을 벗어나면서 수시로 좌우에 가까이하고 온 반변천은 바로 그 한 갈래가 조지훈 시인의 고향이 있는 영양의 일월산에서 발원한 것으로, 물이 맑기로 소문이 났으나 지금은 임하댐에 갇히면서 탁류로 변하여 옛날을 그립게 하고 있다.
-달 밝은 뜰에 앉아 삼을 베끼다 / 밤 여울 물소리 울리는 언덕을 돌아 / 물에 잠겼던 무거운 삼단을 지고-
낭랑한 정서가 굽이쳐 흐르는 반변천변에는 이 시를 쓴 김종길을 비롯하여 김시백, 김원길, 김명인, 조영일, 임병호 등의 시인이 출현하여 서정 짙은 시를 문단에 올렸다.
시우 木月의 편지 [文章講話 문장강화]를 보고 ‘인용되어 있는 나의 글은 거개가 술 이야기였다며 내 글은 이런 걸로만 뽑아 놓았으니 후인이 보면 내가 무슨 큰 주객이나 되었던 줄 알 것 아니냐고 불의의 음모(?)를 공박했더니, 木月이 웃으면서 그래. 당신 글 가운데 술 이야기가 빠진 것이 몇 편이나 있느냐고 슬쩍 피하면서 도리어 역습이 아닌가. 하루아침에 깨어보니 이미 천하의 시인이더라는 것은 바이런의 말이지만 언젠가 모르는 사이에 일대의 주객이 되고 만 것은 나의 경우다.‘ 라고 한 그의 표현처럼 술과 지훈이 얽힌 이야기는 한정 없다. 덤으로 꼬리 하나를 더 달면 내가 시를 배우던 시기에 동경하던 지훈은 오대산 월정사 외전 강사시절 술에 이끌려 산을 오르내리던 취해있는 그의 모습으로 반할만큼 멋을 느꼈다.
내가 굳이 시인이나 술 이야기를 끄집어 낸 까닭은 어린 날 친척집이라도 갈라치면 가장 먼저 정을 느끼는 사람이나 주변 환경이 떠오르는 듯이, 시인을 찾아가는 길에 바라보는 강에는 물결이 길러낸 시인과 물결에 씻긴 달이 잠겨있는 듯한 기분에 술에 익은 지훈이 떠올라서이다.
따지고 보면 안동과 영양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각각의 고을이지만 그 문화적 정서는 동향이나 다름없고 학맥 혼맥 등이 연결되어 오랜 세월 서로 익숙하다. 사람의 됨됨, 살림살이의 규모, 문중까지 서로 꿰뚫고 있는 것이다.
초행에서 김PD는 증조모가 오고 왕고모가 간 집안내력을 여담으로 흘렸지만 그때는 알토란같은 소중한 참고자료로 마음에 쌓았다.
속도를 늦추고 가는 길섶을 살피면 야생화들이 어우러져 있다. 패랭이, 엉겅퀴, 개망초꽃 그렇게 이름을 헤아리며 가다보니 문득 1952년 간행된 그의 두 번째 시집 [풀잎단장斷章]에 실린 ‘산길’이 떠오른다.
혼자서 산길을 간다. 풀도 바위도 구름도 모두 무슨 얘기를 속삭이는데 산새 소리조차 나의 알음알이로는 풀이할 수가 없다./ 바다로 흘러가는 산골 물소리만이 깊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그저 아득해지는 내 마음의 길을 열어준다./ 이따금 내 손끝에 나의 발가숭이 영혼이 부딪쳐...../
그렇다. 시의 울림이 무심히 피어있는 꽃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몸도 공(空)하고 마음도 空하다. 이미 색(色)도 空이요 심(心)도 空일진데 무엇이 만드는가, 만들어지는가. 진공(眞空)이기에 일심(一心)이 생만법(生萬法)하는가. 소유이기에 萬法이 생일심(生一心)하는가. 그의 산문대도무문(散文大道無問)의 정경이 차중의 심안에 여유롭게 펼쳐진다.
주실 동구에 이르면 아름드리 울창한 팽나무에 둘러싸여 ‘빛을 찾아가는 길’ 시 전문이 새겨진 지훈의 시비가 서있다. 1982년 8월 15일 세워진 것으로 ‘맑은 시혼과 드높은 기개는 길이 후생의 가슴을 뛰게 하리라.’는 자못 감동적인 이 비문은 전 고려대학 홍일식 총장이 썼다.
마침 농지에 나온 노인 한 분이 묻지 않아도 반가운 얼굴로 다가서며 지훈 생가의 위치를 알려준다. ‘형이 살아있었더라면 나까지 시를 쓸 필요는 없었는데’ 하며 두고두고 지훈이 안타까워한 세살 위인 그의 형 동진 또한 여덟에 시를 지을 만큼 신동이었다는 이야기가 문득 스쳐 ‘큰 시인 둘이 나올 뻔 했구나’ 하는 감회에 젖으며 마을에 들어섰다.
시인은 갔어도 운(韻)이 넘치는 탓인가, 멀리 일월산을 배경으로 짙은 녹음을 뿜는 산하가 내방객을 맞는다.
‘아름다운 사상(思想)을 아늑한 정서로 쓰다듬어 주는 부드러운 문장- 그것은 내 어린 날의 소망의 하나였다. 식후의 몇 조각 과일같이 싱그럽고 피로할 때에 맞는 한 대의 보혈주사(輔血注射)처럼 흐뭇한 글을 쓰는 것이 어린 마음에 커다란 욕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내가 그러한 글에서 받은 감명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이러한 글을 한편도 이루어보지는 못하였다. 나의 정성과 공부가 모자라는 탓이리라.’
1958년에 펴낸 수상집(隨想集) ‘창(窓)에 기대어’의 서(序)이다. 그는 이어서 정서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읽어서 즐거울 뿐 아니라 피와 살이 될 수 있는 흐뭇한 글을 쓰고 싶다고 밝힌다.
마을을 돌아보고 엷은 나무 그늘에 앉아 더위를 식히면서, 시인이 희망으로 품었던 문장은 남아 각박한 세상에 찌든 사람들의 마음을 닦아주고 있구나 싶어 전신이 찡하다.
-나는 세월과 함께 간다.
세월은 날 떨어뜨릴 수가 없다.-
그의 시선집 첫머리에 실린 작품 ‘길’의 첫 행이다. 누가 가는 세월에 비켜 앉아 살 수 있는가. 깊고 그윽한 풍경을 감싸 안고 맞는 지훈 시의 울림이 주실을 나서는 방문객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늑한 거리(距離)에/ 그대 나를 조용히 찾아오느니-
그의 시 ‘민들레꽃’을 떠올리며 안동에서 올 때 지나친 이곳에서 멀지 않는 감천에는 생전에 지훈이 자주 찾던 동향의 선배 시인 오일도의 고택이 있어 들렸다 갈 요량으로 바쁘게 길을 재촉한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