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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 아이들(글/피재현 - 나섬학교 교사)

씨감자가 어렵사리 싹을 틔워
세상을 볼 눈 하나를 만들면
감자는 온 몸을 썩히며 씨앗 하나를
땅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온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것은,

감자 하나가 땅 속에서 오롯이 썩어가는 일이다.
썩은 감자의 영혼이 하얀 감자꽃으로 피었다.

- 졸고, 감자꽃 전문-

# 1. 감자심기
올 봄에는 제일 먼저 한 일이 아이들과 감자를 심은 일이었다. 내 기억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싹이 올라 온 감자를 눈이 골고루 들어가게 쪼개어 묻었다. 그리고 흙을 덮고 꼭꼭 눌렀다. 감자는 땅 속에 묻히면 먼저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싹을 땅 위로 밀어 올리는데 그 전에 바람이 들면 감자가 썩기 때문에 흙으로 꼭꼭 덮어주는 것이다. 조막만한 감자 하나가 뿌리와 싹을 아래위로 밀어내는 사이 감자 살은 흔적도 없이 썩어간다.
몇 주 전에 아이들과 고구마와 땅콩을 심었는데졗跏슴줎심은 감자가 궁금해 가 봤더니 한 밭 가득 잎이 무성하다. 지우개만한 감자 한 조각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밀어 올려 일군 살림살이 치고는 너무나 성대한 것이었다. 감자밭은 푸르다. 흰 꽃을 게워내고 감자를 주렁주렁 매달 것이다. 그 사이 고구마도 땅콩도 앞 다투어 커 갈 것이다.

# 2. 실한 감자처럼
오늘은 내가 점심식사 당번이었다. 마침 장이 서는 북문시장을 어슬렁거리며 쑥갓과 깻잎을 좀 샀다. 오늘 메뉴는 잔치국수다. 한참 먹성이 좋은 우리 아이들이 국수 한 그릇으로 긴긴 하루를 버티기에는 역부족일 터, 그래서 튀김을 곁들이기로 했다. 고추까지는 쉽게 샀는데 의외로 감자 사기가 쉽지가 않다. 튀김용 감자는 좀 길고 커야 좋은데 오늘 장에 나온 감자가 영 신통찮다. 몇 군데를 들러 실한 감자를 사와서 껍질을 벗기고 썰어 놓고 보니 제법 섹시하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난 한동안 감자와 정을 통할 것 같다. 감자를 닮아 감자 같은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 3. 동네탁구, 양반탁구
K는 나섬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등산을 해 봤다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해 봤다고 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탁구를 쳐봤다고 했다. 등산은 너무 힘들어서 백두대간 대야산을 중턱쯤 오르다가 돌아왔지만, 탁구는 재밌어한다.
K를 데리고 시내 탁구장에 갔다. 아무래도 나한테 탁구를 배웠다가는 동네탁구 수준을 못 벗어나겠기에 레슨을 부탁드리러 간 것이다. 이참에 나도 제대로 좀 배워볼까 싶어서 둘이 같이 레슨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레슨 첫 날 강사는 레슨을 거부하고 우리를 돌려보냈다. K의 자세가 너무 뻣뻣해서 도저히 레슨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사가 자기 입맛에 맞는 수강생을 고르다니.......참 속편하게 장사하는 사람이다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처럼 K가 관심을 보인 일인데 난감했다. K가 버스를 타고 돌아간 다음 기분이 너무 우울했다.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나는 K가 나섬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하게 된 일 중에 어느 한 가지는 정말 좋아했으면 하고 바랬다. 그래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 일을 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다음날, K를 데리고 시내에 갔다. 탁구레슨에 필요한 장비를 직접 만들고 내가 해보기로 했다. 앵글을 짜고 그물을 사서 씌웠다. 그리고 탁구공을 100개쯤 샀다. 탁구공 담을 바구니를 사고 시내 탁구장에서 곁눈질로 봐 둔대로 탁구공을 받아줄 그물대를 만들고 공 줍는 통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의 탁구레슨은 시작되었다. 강사인 나는 동네탁구 수준이고 수강생인 K는 여전히 양반탁구지만 하하, 어떠랴. 동네탁구를 평정하리라!

# 4. 거울이의 금연결심
우리 대장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거울이가 왔다. 이제 우리 나섬 식구들이 다섯 명으로 늘었다. 거울이는 처녀 같은 옷차림으로 하이힐을 신고 왔다. 거울이의 패션은 양 극단을 달린다. 체육복 아니면 정장. 이 얼마나 분명한 선인가! 나는 그런 거울이가 좋았다.
하루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신경질을 낸다. 왜 그래?, 왜 그러는 건데?...... 하하, 니코틴 부족에서 오는 금단현상이었다. 돈이 없어 담배를 못 사 피웠단다. 능력 안 되면 끊는다는데...우리 끊어볼까? 좋아요. 그렇게 우리는 금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담배가 피우고 싶으면 미칠 지경이라는 거울이. 나는 이해한다. 암! 이해하고말고!
거울이는 담배가 없으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다가 지쳐서 잠든다. 이제 담배를 피운 지 1년 정도 되었으니 그렇게 몇 번을 펑펑 울고 나면 끊을 수 있으려니 했다. 그런데 어디서 돈이 생겼는지 거울이는 내가 몸살을 앓으면서 담배를 참아내는 9일 동안 줄곧 담배를 피웠다. 저도 미안했는지 이제 나에게 담배 이야기는 절대 안한다. 금연 9일째, 아들 녀석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그날 병원에서 나의 금연도 끝나고 말았다. 이번엔 마후라를 잡고 담배 끊자고 졸라볼까?

# 5 뻥쟁이 쌤!
아이들은 나를 뻥쟁이라고 부른다. 사실 나만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우리 쌤들은 모조리 뻥쟁이다. 몇 차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가 뻥쟁이가 되고부터 내 책상머리에는 아르세니우스라는 작자가 했다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붙어있다.
“나는 종종 말한 것을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을 지킨 것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올 해는 말이 나를 멍들게 했다. 내가 한 말 내가 들은 말 할 것 없이 무수한 말들이 나를 치고 지나갔고 나는 탈진상태가 되고 말았다. 어느 순간부터 말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아이들과 나누는 대화도 많이 줄어들었다. 대장하고는 자주 옥상에 올라가 이것저것 오래도록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이젠 말이 많이 줄었다. 과묵한 K탓이기도 하다.
나는 K에게서 눈과 웃음으로 하는 대화법을 배웠다. 내가 열 마디 스무 마디를 해야 겨우 한 마디 툭 던지는 K이지만 지금껏 K가 한 말은 대체로 나를 기쁘게 하는 말이었다. 꼭 말을 많이 해야만 서로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눈빛과 가슴에 충만한 애정과 믿음이 아이들과 나의 경계를 허물고 진정한 소통의 길을 열어준다. 여름이 오기 전에 뻥쟁이의 오명을 벗어야겠다. 그럴려면 아이들과 오리배를 타러가야 한다.

# 6. 마후라의 사랑
마후라는 최근 남친과 헤어졌다. 화가 난 남친은 아예 원양어선을 타겠다고 바다로 갔다고 한다. 당당해보이지만 마후라는 요즘 심하게 아플 것이다. 학교도 며칠 째 나오지 않는다. 나도 늙은 것일까? 마땅한 위로가 생각나지 않는다. 떡볶이, 라면, 불고기, 삼겹살, 참치....... 식단표에 먹고 싶은 것만 잔뜩 써놓고는 통 전화도 받지를 않는다. 1년을 넘게 사귄 남친과 헤어진다는 것은 엄청나게 슬픈 일이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하루하루 날짜를 세면서 둘이 나누었을 정은 어쩌면 둘 다에게 살아가는 가장 큰 힘이었을 텐데....... 아이들에게는 친구가 제일이다. 무엇보다 친구가 우선이고 우정과 의리가 최고의 가치다. 이건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때로 쥐약이 되기도 한다. 친구가 좋아서 밤새 이야기하고 다음날 늦게 나오고,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 일처럼 해결사가 되어 학교고 뭐고 뒷전이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어른들이 주지 못한 사랑의 빈자리를 자기들끼리 채워주며 서로를 위로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날씨가 꿀꿀하다. 비가오려나? 마후라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이, 마후라! 늦게라도 나와라 쏘주 한 잔 하자!! <안동>

위탁형 대안학교인 ‘나섬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들이 서로 별명을 부른다. 강력반장, 몬스터 등의 선생님과 대장, 거울이, 마후라 등의 학생들이 어우러져 열린학교를 만들기 위한 교육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