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에서의 삶과 죽음(글/김승열-안동성소병원 응급의학과장)
세월의 변화만큼 죽음의 풍속도 많이 바뀌어
사람이 살면서 겪는 가장 큰일이라면 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죽는 일이다. 그러므로 문화와 민속의 변화의 정도를 보는 하나의 방법으로, 생로병사와 결혼, 출생의 풍속을 살피면 그 변화를 잘 알 수 있다.
의사가 되어 약 20년 동안을 살펴보면 이 중에서도 특히 죽음을 대하는 풍속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있어왔다.
지금부터 15년 전만 하더라도 객사, 즉 집 아닌 곳에서 죽으면 매우 불길하게 여기거나 망자에게 좋지 않다하여 기피하는 풍속이 광범위하게 있었다. 그래서 사망이 임박한 환자는 집으로 옮기는 일이 아주 많았다. 때로는 이미 사망한 환자라도 구급차로 환자를 -사실은 시신을- 형식적인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옮기면, 심폐소생술을 하는 시간 동안은 법적으로, 형식적으로는 사망상태가 아니므로 기계호흡을 시키면서 옮기다가 집에 도착한 후 사망선언을 하는 예도 많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로 집에서 사망해도 병원의 영안실이나 장례식장으로 옮겨 장례를 치루고, 집에서 장례식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졌으니 정반대로 풍속이 바뀐 셈이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옛 방식대로 집에서 장례를 치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시는 도시대로 집에서 집의 규모와 도와 줄 사람이 없기에 장례를 치르기 어렵고, 농어촌은 농어촌대로 마찬가지로 불편함과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고, 또 친지들이 현대 사회의 직장생활에서 장례식에 참석하기 어려운 등등의 이유가 원인이며, 또 예전처럼 이제 장례식에 참석하여 밤을 새는 일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경제의 변화가 장례풍속마저 바꾸게 한 사례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노령의 환자들이 죽었을 때 아들, 딸을 비롯한 가족, 친지들도 예전에는 응급실에서부터 통곡을 하는 일이 흔히 있었지만 최근에는 비교적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족으로 부모의 죽음에 과도하게 슬퍼하거나 의료진에게 항의하는 자식들은 대개는 부모 생전에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식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이제 부모의 생전에 불효를 갚을 가능성이 사라졌으니 더 더욱 슬퍼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부모의 죽음 이후에 효자는 살아서는 불효자였을 가능성이 많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부모 생전에 할 도리를 다했다면 슬픔도 덜하리라는 추측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전이암이나 말기암 환자에 대한 통지가 의사 사회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즉 말기암이나 전이암등 불치의 질병을 앓는 환자에게 이를 알려야 하나 알리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의사들의 의견은 반반으로 갈렸었다. 약 20년 전만 하더라도 대개는 알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의사든 환자, 가족 모두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환자가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역시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가슴에 묻는 자식의 죽음앞에선 의료진도 숙연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응급실의 풍경이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보여주는 모습이다. 아니 부모뿐만 아니라, 응급실의 의사나 간호사도 마찬가지이다. 노령의 환자의 사망에는 무덤덤하지만 대개의 의사나 간호사들도 어린이나 청년의 죽음에는 슬픔과 함께 어린 나이에 죽게 한 운명이나 혹은 죽음을 가져온 원인이나 사람에게 분노까지 느낀다.
전혀 망자와 관련이 없는 의사와 간호사도 어리거나 젊은 죽음에는 슬픔과 분노를 느끼니,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이 절절히 가슴에 와 닿고,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그 보다 큰 불효가 없다는 말뜻을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의 통곡에서 느낄 수 있다.
또 그 반대로 아주 고령의 환자들에게는 과연 죽음이 두려운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삶과 죽음에 초연한 분들도 적지 않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남은 가족과 친지에 대한 염려와 상실감과 죽을 때의 고통에 대한 염려 때문이라고 한다. 죽음으로써 이제껏 맺은 모든 관계가 상실하기에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살 만큼 살아온 고령의 환자들은 말하자면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거나 덜 두려운 듯하다. 더구나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의식이 흐려진 분들은 자기의 죽음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며칠, 혹은 몇 달 이상 더 살다가 사망하는 경우도 흔해지고 있고 이러한 경우에는 죽음이 두려워 할 의식도 없으니 죽음에 대한 인식도 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살아서 여한이 없는 삶, 죽음에 대한 최선의 준비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나타난 큰 변화는 죽음을 둘러싼 문화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예전에는 죽음은 전혀 예기치 않게 갑자기 찾아오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수명 연장을 위한 의학의 발달로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죽는 일이 일반적이다. 생명의 연장만큼 죽음도 연장되고 있다. 풍속과 관습 중에 가장 변하지 않는다는 장례 문화도 이렇게 급속히 변하고 있으니, 이제 죽음을 준비하는 일도 달라져야 한다.
응급실 의사로서 수많은 죽음을 접하면서 느낀 점은 죽음을 준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다. 죽음을 둘러싼 문화 중에서 당사자를 둘러싼 문화는 변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으나, 언젠가는 죽어야 할 당사자로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문화나 의식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즉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인식은 아직 미흡하다는 뜻이다.
인생의 축소판이라 할 응급실에서 품위 있게, 삶과 죽음에서 초연한 채 아무런 여한 없이 삶에 연연해하지 않으시면서 돌아가시는 분들을 보면서 살아서 여한이 없는 삶이야말로 최선의 죽음에 대한 준비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서 최선을 다하고 죽음에 임박해서 삶에 연연해하지 않는 죽음이야 말로 최선의 삶과 죽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자신에게는 없는 일처럼 살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이지만 준비하지 않으면 늘 여한이 남는다. 최선의 죽음의 준비는 최선을 다한 삶이겠지만, 그 반대로 최선의 훌륭한 삶은 좋은 죽음으로 증명된다.
옛날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는 해골을 수도원에 두고는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준비하는 사람이 최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응급실의사로서 수많은 죽음에서 배운 점이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