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음악회로 새해를 연 안동시 의사회 최헌욱 회장(글/백소애-편집기자)
청진기 벗고 색소폰 불고 노래하는 의사들
벤자민 프랭클린은 말했다. ‘신(神)은 고치고 의사는 치료비를 받는다.’고. 그러나 그 말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신은 고치고 안동의사들은 음악으로 치료한다.’로.
지난 1월 18일 안동시민회관 소공연장에는 흰 가운과 청진기를 벗고 연미복을 입은 안동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진료실을 벗어난 그들이 탬버린을 흔들고 색소폰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평소 괜스레 권위적인 모습만을 생각했던 많은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날 공연을 기획하고 진행시킨 안동시 의사회 최헌욱 회장(51세, 동산정형외과의원 원장)을 만나 얘기를 나누어보았다.
간간이 해동비가 흩뿌려졌지만 이미 봄 날씨였다. 평소에도 의사 가운을 잘 입지 않는다는 그가, 자선음악회 무대 위에서 보았던 온화한 얼굴 그대로 반갑게 맞았다. 평소 환자를 진찰해온 터라, 본인이 진단(?)받아야 하는 자리여서인지 “아니, 내가 무슨 취재대상이나 되나요?”하고 되묻는 걸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권위를 벗어던지고 시민에게 먼저 다가서기
최헌욱 회장은 지인들과의 만남에서 몇 년 전부터 ‘안동에서 음악회를 하면 어떨까, 명사 음악회라는 타이틀로 지역 인사들이 참여해서 모금도 하고 좋은 일을 한번 하자’는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자선음악회도 음악회지만 지역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가졌는데 이번 공연으로 그 바람은 얼추 이루어진 듯하다. 꽉 찬 관객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고 특히나 방청석 곳곳에서는 “아이구, 저 분은 날 진료하셨던 분인데 저렇게 신명이 있었나?”하는 소리도 들렸다. 권위를 벗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이 정도면 지역민들에게 녹아들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이번 공연은 김재왕, 윤태권, 권세홍, 장완섭 등 의사회 중창단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기획하고 열심히 밀어붙였다. 권세홍(안동병원 영상의학과) 과장이 준비위원장을 맡아 ‘언제는 안 바쁘게 살아온 사람들인가. 이번 기회에 일 한번 벌여보자’고 최헌욱 회장과 발 벗고 나섰다. 식사자리에서 이 계획을 알게 된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 안상돈 지청장이 ‘그런 좋은 자리면 나도 출연하겠다’고 자청해서 찬조출연을 해서 검사, 의사들이 공연을 하는 재미난 풍경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날 최 회장은 원래 모래시계의 삽입곡인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소나타 중 12번 E단조를 연주할 예정이었으나 반주를 준비할 수 없어서 불과 열흘을 앞두고 타이타닉의 주제곡인 ‘My Heart will go on’으로 바꿔 연습했다. 취미생활로 연주해온 색소폰이지만, 학창시절 이후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둔 세월이 있던 터라 열심히 연습해 무대에 설 요량이었는데 계획이 약간 어긋났다. 음악회 당일 모자란 연습량을 알려주듯 고음에서 속칭 삑사리가 나서 당황했다고 한다.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연주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마음에 걸렸고, 음악회 녹화 DVD를 보고는 그 아쉬움이 더욱 컸다 한다.
그러나 그날 그의 색소폰 연주와 윤태권 원장과의 ‘문 밖에 있는 그대’의 앙상블은 관객의 갈채를 가장 많이 받았다. 윤태권 원장의 현란한 탬버린 연주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하자, 그날 친 탬버린은 평소 실력의 반도 안 보여준 거라고 한다. 오히려 평소보다 너무 얌전히 쳤다며 웃는다.
타 지역에서도 연말이나 연초에 의사들이 갖는 행사가 있지만 이렇게 직접 연주하고 노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에 고무된 타 지역 의사회에서의 격려전화도 많았고 ‘다음에는 우리도 한다’며 계획 중인 곳도 있다한다.
앞으로도 이런 행사를 계속 할 계획이냐고 묻자, 주위에서 이렇게 좋아하시고 호응해주는데 이젠 안하면 안 되는 분위기가 되었다며 웃는다. 모금한 금액 중 경비를 제외하고 총 600만원이 남았는데 300만원은 요셉의 집 무료급식소에, 나머지 300만원은 안동시종합사회복지관에 재가어른들을 위한 성금으로 기탁했다. 안동시민의 뜨거운 호응으로 인해 안동시 의사회가 지역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고 한다.
잊혀지지 않는 눈 오는 날의 안동과의 인연
“이렇게 음악회를 위해 준비하느라 많이 소홀했는데 다 이해해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와아, 하고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가 터졌다. 음악회 시작 전 관객들 앞에서 한 최헌욱 회장의 인사말에 모두들 즐거워했다. 그러나 무뚝뚝한 안동남자들의 지탄(?)을 받을만한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공공연한 자리에서 애정을 과시한 최헌욱 회장에게 물어보았다. “굉장한 애처가이신 것 같은데, 실제 댁에서도 그렇게 애정표현에 스스럼없으신가요?” 하자 “애처가요? 애처가가 무슨 뜻인 줄 압니까? 마누라 애먹이는 사람이 바로 애처갑니다. 하하.”
대학생인 딸과 올해 대학에 입학하는 아들이 멀리서 공부 중이라 부부만 남아있어 그렇게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고. 결론적으로 정말 그는 ‘마누라 애(愛)먹이는 사람’이 맞는 모양이다.
대구가 고향인 그는 1990년 1월 30일에 안동 성소병원에 근무를 하면서 안동에 오게 되었다. 당시 성소병원 박창희 원장이 아버지하고 친분이 있던 분이라 ‘무조건 오라’고 간곡히 말했다고. 그날 사택에 이삿짐을 부리고 있을 때 눈이 펑펑 내려 뭔가 좋은 일이 있을려나보다 생각했다 한다. 3년 후 1993년 1월 16일에 정형외과를 개원할 때도 눈이 펑펑 내려 그 날짜를 정확히 기억한다. 지금의 약수탕 맞은편에 위치했는데 2000년 1월에 지금 병원이 있는 태화오거리로 옮겼다. 그때 역시 눈이 펑펑 내려 우연의 일치라기엔 굉장히 특이한 기억으로 남았다고.
성소병원 정형외과장으로 근무할 당시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한 몇 년 근무하고 다시 대구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번 생활하면 사람 발목 잡는 ‘안동’의 투박한 정에 이끌려 이젠 안동사람이 다 되었다. 1년쯤 근무했을 때, 서울 삼성병원에서 연락이 와 이직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그때 원장과 동료들은 물론 한직에 있던 직원들까지 집으로 찾아와 가지 말라고 말릴 정도였다니 최 회장은 한정 없는 안동사람들 정에 진한 감동을 받았다 한다.
그 시절, 촌에서 힘들게 나온 분들이 오전 11시까지 접수하지 않으면 당일에 진료를 받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오전에 온 사람만이라도 어떻게든 진료를 하고자 뛰어다니다보니 점심을 계속 거르게 되었다. 1년 이상을 식당위치도 모를 정도였다 하니 오죽했을까. 그러다 나중에 간호사, 간호조무사들과 함께 라면도 끓여먹으며 간단히 떼우기도 했단다. 잊지 못할 그 시절 옛 추억은 현재 20여명의 병원식구들과도 오순도순 지낼 수 있게 한 틀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환자나, 의사가 되길 참 잘했다는 보람을 느꼈을 때는 과연 언제였을까? 많은 분들 중에서도 특히 기억나는 환자는 북후에 있는 중학생이라고. 어렸을 때는 걸어 다녔는데 크면서 걷지 못하게 된 큰 덩치의 중학생을 자그마한 어머니가 낑낑대며 업고 다녔단다. 주위에서도 걷기 어려울 거라 믿고 있었고 어머니도 힘겹게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와서 장애진단을 받고자 했단다. 진단을 해보니 수술을 하면 걷는데 지장이 없을 것 같아 수술을 권했더니 소용없을 거라고 했다. 어머니를 설득해 수술을 했다. 결과가 좋았고 그 중학생이 지금은 건강한 20대 청년이 되어있다고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인생에 이렇게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에, 의사라는 직업이 천직이라 생각하고 좋다고 한다. 반면 후회될 때는 없었는지 물어보자 다행히도 아직은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역에서 의사들의 역할, 충실히 이행할 터
의사회의 역사는 종합병원으로 치자면 성소병원이 1909년에 개원했으니 안동에서도 얼추 100년의 역사가 된다. 1908년 한국의사연구회가 현재 대한의사협회의 모태가 되니까 한 세기의 역사를 지닌 전문가 단체인 것이다. 최헌욱 회장은 작년에 안동시 의사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추대된 날은 공교롭게도 최헌욱 회장이 참석을 안 한 날이다. 반상회에서 반장 뽑을 때 주민들의 참석을 독려하고자 하는 레파토리가 ‘안 나온 사람 뽑는다’는 으름장인데, 의사회에서도 그렇게 된 거냐고 하자, 최헌욱 회장이 껄껄 웃는다.
“그건 아니고요. 지역에서 의사회 회원들의 교류가 빈번하잖습니까? 어떻게 보면 궂은 일이 되다보니까, 이번엔 누가 총대 메고 열심히 해줘야 되고 다음에는 누가 수고해줘야 된다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만들어져서 말이죠. 이번에는 아무래도 제 차례였던 것 같습니다.”
지역병원의 서비스 질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에도 지역민들의 서울병원 선호와 지역병원 불신이 여전하다고, 어떻게 해소되는 게 좋을 거냐고 물어보았다.
“그건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구에 있는 환자도 서울에 갑니다. 교통편이 발달하면서 더욱 그런 현상이 심화됩니다.”
점점 대형화되어가는 의료 환경 속에서도 의사 개인이 행하는 ‘인술’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최헌욱 회장. “옆집 누구 엄마가 두 달 전 감기를 앓았는지 어땠는지, 뒷집 누구가 감기 걸려 그 동생에게 옮았는지 어쨌든지....... 지역민과 나누는 인간적 관심, 그런 것들이 다 주치의 개념 아니겠어요?”
신뢰를 바탕으로 푸근한 인정이 넘치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하는 그의 바람이 엿보인다.
의사회 활동 중 애로사항이 있는지를 물으니 다른 것보다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진료를 하다가도 해결해야할 의사회 일이 있으면 마음이 급해지는 것이 가장 힘든 점이라고. 그리고 의료법 개정문제로 한창 시끄럽다. 민감한 사안인지라 최 회장이 짧게 코멘트를 남긴다. “의사들이 마음 놓고 진료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하고 언론에서 비쳐지는 의사들의 모습이 편향적인 시각이 아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안동사람이 다 된 그가 안동에 터를 잡을 수 있도록 확신이 서게 한 것은 존경할만한 선배, 동료 의사가 많다는 점도 한몫 했다. 사재를 털어 한센환자와 불우한 이웃을 돌보는데 평생을 바친 안동시온재단의 정창근 원장이나 김재왕, 윤태권 원장 등 바로 옆에서 귀감이 되는 의사들이 있는 곳에서 평생의 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의술이 곧 인술이라는 믿음 주는 의료인 될 것
현재 안동시 의사회에 소속된 의사는 개업의 75~6명 정도에 종합병원에 100여명이 있으니 총 180여명 정도이다. 회장이 되고나서 꼭 하고 싶은 사업이나 구상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자선음악회 하나는 이루었고요. 일단은 환자들, 지역민들에게 탈 권위의 모습으로 친근하게 다가가는 게 그게 최우선 과제였는데 음악회하면서, 어떻게 조금은 이루어진 거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또 하나는 9월달에 ‘의사의 날’을 정해서 의학강좌나 농촌지역 무료진료 등의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지역민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구체화시키는 그들의 노력은 ‘치유’를 넘어서 ‘공유’가 되고 있다.
“솔직히 의사라는 직업을 개인 입신을 위해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성향을 가진 의사도 다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회 차원에서 이런 기회를 만들어주고 함께 참여하다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그 깊이도 깊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회 구성원 중 ‘주류’의 삶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봉사와 나눔의 기쁨을 알아간다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일이다. 무슨 일이든 한번 하기가 어려워 그렇지 일단 하고나면 얘기는 달라진다. 의미 있는 일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의사들의 진솔한 모습을 지역민들이 흐뭇하게 지켜볼 것이다.
슈바이처는 ‘우리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하나는 안다. 앞으로 진정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사람들은 남에게 봉사하는 방법을 발견하고 찾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개인적으로 은퇴 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사랑한단 말을 공개적으로 들은 사진 찍는 취미를 가진 부인 장선자씨와 의미 있는 노후를 맞고 싶다고 한다. 부인은 어르신들의 영정사진을 찍어주고 최 회장은 색소폰연주를 하면서 시골의 어르신들께 조그마한 기쁨을 드리고 싶다고 한다. 그때쯤이면 서로 희끗희끗한 머리로 만나지 않겠냐며 웃는다. 조금만 더 일찍 사회활동에 적극적이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을 가진 그가 미래의 바람을 위해서 지금 이렇게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자선음악회를 기획하면서 팸플릿 한 귀퉁이에 적어둔 ‘모시는 말씀’에는, 진료시간이 끝나고 숨이 차게 뛰어갔을 연습실에서 흘린 땀의 성과가 헛되지 않았음을 믿게 하는 진심이 담겨있다.
“5년, 10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여러분은 환자였고 우리는 여러분의 아픈 육체를 고쳐주는 의사일 뿐이었습니다. 이젠 우리도 당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흘러간 노래, 요즘 노래도 부르며 서로를 걱정하고 보듬는 이웃이고 싶습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