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로루 이야기(글/윤천근-안동대 교수)
예천의 금당실
금당실은 10승지지에 속한 곳이다. 10승지지란 풍수적인 명당이면서 전쟁이 나도 화를 입지 않을 곳을 의미한다. 당연히 장풍과 득수를 이루고 있는 곳,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일 수밖에 없다. 대개 10승지지로는 영월 정동, 풍기 금계, 봉화 춘양, 용궁 금당실, 합천 만수동, 보은 중항, 공주 마곡, 무주 무풍, 부안 변산, 운봉 두류산 등이 꼽힌다. 다들 깊은 산곡에 위치하며 일정하게 농경이 가능한 터전을 갖추고 있는 곳들이다. 전자는 안전을 보장하여 주는 조건이고, 후자는 생활을 가능하게 하여 주는 환경이라고 하겠다.
예천읍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길을 타고 오래 올라가면 금당실에 이른다. 평화롭고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이다. 마을영역은 넓다. 조선이 도읍을 옮길 땅으로 고려하기도 했다는 속설이 있는 것은 이 마을이 수도를 들여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금당실은 원래 감천문씨가 개척한 곳이다. 후에 함양박씨와 원주변씨가 감천문씨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정착함으로써 오늘날은 이 두 가문 사람들이 많이 세거하는 곳이 되었다. 함양박씨의 금당실 입향조는 박종린朴從鱗이고, 원주변씨의 금당실 입향조는 변응령邊應寧이다. 두 사람은 여기 정착하여 마을의 형상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금당金塘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금당실을 지나쳐 서북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북쪽 방향으로 열린 골짜기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샛길이 나온다. 입구에는 ‘감로루’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입구에서 1.8킬로미터 골짜기 안을 거슬러 올라가면 감로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골짜기 한편을 타고 오르는 길은 시멘트로 잘 포장되어 있다. 새로 포장된 느낌이 분명하고, 2차선의 교행이 가능할 정도의 넓은 길이다. 골짜기 안의 분지는 넓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좁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산곡은 굴곡이 뚜렷하고, 어느 정도 기울기도 있다. 길이 돌아들 때마다 산곡은 새로운 분지들을 자세를 바꾸어 가면서 풀어낸다. 높이를 달리하는 분지들이 감로루에 이르는 2키로 남짓한 골짜기 안을 메꾸고 있다. 골짜기 안 가장 깊은 지점, 골짜기가 끝나는 지점은 좀 가파르다는 느낌의 경사 길 위에 좁직한 평지가 자리 잡고 앉았다. 감로루가 올라앉아 있는 부분이다.
감로루 영역은 조금 높은 산곡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경사길을 밋밋하게 타고 올라온 길이 조금 높은 언덕 위로 올라앉으면 감로루 영역이다. 이 영역은 길을 중심으로 하여 공간 전체가 중앙과 좌우로 3분 된다. 중앙은 조금 높다. 거기에 감로루가 지어져 있다. 좌우는 한단 낮은 높이의 좁직한 밭이다.
감로루 앞은 가파른 산곡이고, 바로 앞쪽으로는 남쪽 방향으로 시야를 막고 나서는 높은 산이 있다. 산곡은 깊다. 감로루 영역이 높이 올라서 있으므로 산이 높다는 느낌보다는 골이 깊다는 느낌이 강하다. 산곡의 아래쪽에 펼쳐진 분지는 넓지 않다. 그러나 위쪽의 산봉우리 쪽으로 올라서면 봉우리들이 경사면을 타고 뒤로 물러서므로, 공간이 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감로루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오므라지지도 펼쳐지지도 않은 딱 적당한 공간 안에 들어서 있다는 감상이다.
감로루의 앞에는 두마지기 정도의 논이 마련되어 있다. 순전히 하늘의 도움으로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이라고 하겠다. 논의 남쪽 끝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옛 나무는 죽어서 껍질만 남아 서 있고, 거기 기대서 젊은 느티나무가 버티고 섰다. 한아름 정도 굵기의 젊은 나무이다.
감로루는 함양박씨 금당실 입향조 박종린朴從鱗의 재실로 지어졌다. 안내판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2호
소재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원류리 105
이 건물은 함양박씨 예천 입향조인 정랑공正郞公 박종린의 묘지수호를 위하여 1600년대에 세운 재실의 부속건물이다. 속칭 허리골의 산 중허리에 위치하는 일곽의 경역은 누각, 희이당希夷堂, 문간채, 외양간 등 4동이 ‘튼 ㅁ’자로 배치되어 영남북부지역 재실건축의 전형적인 배치법을 하고 있다. 특히 누각채의 아래층은 부속공간인 마구간으로, 위층은 중앙 3칸을 통칸의 대청으로 꾸몄고, 양 퇴칸은 온돌을 설치하고 사방으로 돌렸다. 대청벽면에는 당대의 명필인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의 글씨라 전하는 편액이 되어 있다.”
재사는 누각, 북쪽 건물채(안채), 동쪽 측문채, 서쪽 측문채 등 네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건물은 따로 떨어져 있으며, 그 사이는 낮은 담장으로 메꾸어졌다.
감로루는 재사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남향의 2층 건물이며, 재사 건물의 중심이다.
재사는 4층의 서로 높이가 다른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제일 낮은 곳은 재사 남쪽의 바깥마당이다. 이 바깥마당은 아래쪽이 자연석으로 3단의 석축을 쌓아 만들었는데, 새로 작업을 한 것이다. 바깥마당의 위쪽으로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자른 자연석을 4단으로 쌓아 또 한 단 높은 기단을 만들었다. 그 위에 누각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 기단석도 요즘 새로 손을 본 것이다.
감로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건물이다. 정면 5칸을 예로 들어 말할 때, 이 건물은 좌우 대칭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 건물의 중앙칸에는 대문이 위치한다.
4단 기단석의 중앙부위에 가설되어 있는 계단을 오르면 뜨락이다. 뜨락 위에는 낮은 초석이 놓였다. 자연석이다. 초석 위에 올려진 기둥은 원형이다. 양쪽의 원형기둥 안으로는 각재 가둥이 붙여 세워졌고, 그 안쪽으로는 역시 각재로 이루어진 문틀이 사방으로 돌아간다. 아래쪽의 문턱은 중간이 아래로 굽은 모습이다. 위쪽의 문지방은 직선의 각재이다. 사각의 문틀 안으로는 문틀 모양으로 아래쪽이 호선의 곡선으로 처리된 나무대문이 달려 있다. 원형기둥은 2층의 바닥판을 이고 있다. 바닥 나무판을 고정하고 있는 각재 횡목이 원형의 기둥머리에서 종횡으로 교차한다. 그러한 각재횡목을 좌우로 틀로 삼아 그 사이에는 나무판이 채워져서 2층의 바닥 마루를 완성시켜 준다.
대문 양쪽으로는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는 판재 벽이 각 1칸 씩 붙어 있다. 대문과 좌우 나무칸 벽을 포함하는 정면 3칸 영역은 감로루의 1층 헛간 영역이다. 1층의 양쪽 끝으로는 역시 각 1칸씩의 흙벽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2층의 온돌방을 떠받치고 있는 1층 기단 영역이다. 이곳은 허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돌과 흙으로 싸발라져 있다. 그리고 중앙의 위쪽으로는 높은 지점에 사각의 작은 아궁이가 뚫려 있다. 이 벽면은 2중의 미학으로 처리되어 있다. 아궁이 아래쪽은 사각의 돌을 흙으로 이겨붙인 것이고, 아궁이 위쪽으로는 기왓장을 역시 흙으로 붙여 층층으로 쌓은 것이다.
감로루의 2층 바닥면 밖으로는 사방이 다 3쪽의 쪽마루를 깔아 돌려져 있다. 쪽마루의 바깥쪽 끝으로는 난간이 붙었다. 감로루 대문 아래 서면 머리 위로 3쪽을 붙여 깐 난간 마룻바닥이 튀어 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난간구조는 비바람을 막는 차양으로써의 기능도 수행하는 것이다.
감로루의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2층 바닥마루가 천정을 이루고 있는 헛간이 나오고, 좌우로는 양쪽 온돌방의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는 돌 벽이 막아선다. 감로루 영역 북쪽으로는 안뜰이 마련되어 있다. 좁은 사각형의 공간이면서, 감로루의 바닥면보다는 허리춤 정도는 높이 올라선 것이다. 감로루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감로루 영역 4층 대지 중 제 2층이다. 제 3층은 안뜰과 양쪽으로 벌려선 부속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안뜰로 올라서서 뒤로 돌아서면 왼편으로 감로루 누각으로 올라가는 두툼한 나무판 계단이 가설되어 있다. 감로루 누각은 그 나무판 계단을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다. 감로루의 2층은 동서 양쪽 끝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의 온돌방을 두고,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마루를 배치한 모습이다. 마루판은 기둥 밖으로 3쪽 정도 넓이로 더 머리를 내밀어 서방으로 난간을 돌렸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이다. 난간은 모서리 부분에서는 직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끝을 자르고 사선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져 있다. 2층 누각은 정면 3칸은 나무판과 나부판 문으로 막혀있고, 뒷면 3칸은 그냥 개방되어 있다. 좌우 방향은 온돌방의 방문과 벽이다.
누각 안은 휑하니 비어 있다. 그 흔한 현판 하나 붙어 있지 않는 것은 서운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현판은 누각 중앙의 남쪽 처마 밑으로 밖에 붙어있는 감로루라는 편액뿐이다. 이 편액은 청풍자 정윤목이 썼다고 하는데, 상당히 거칠게 휘갈겨 쓴 것이며, 조금 어지럽다는 느낌이 드는 필체이다. 편액의 바깥을 사선으로 돌린 액자구조는 단순한 단청칠을 하였는데, 이것이 편액의 글씨가 어지럽다는 느낌을 강화시켜 준다. 물론 이러한 감상은 글씨를 잘 썼느냐 아니냐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글씨를 평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인 것이다.
감로루 건물은 1층이든 2층이든 할 것 없이 바깥으로 나서 있는 것은 모두 원형기둥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 있는 기둥은 각형이지만 말이다.
감로루 영역 제3층 기단의 동쪽 방향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부속채가 자리 잡고 있다. 남쪽의 감로루 건물과의 사이에는 좀 넓은 틈이 있는데, 이곳은 깨진 돌로 두툼한 석단을 낮게 쌓아 메꾸었다. 이 동쪽 부속건물의 남쪽 1칸은 동쪽으로 나가는 측문이 마련되어 있다. 양쪽 나무문으로 만들어진 측문을 밀고 나서면 여러 단으로 넓게 가설되어 있는 계단을 통해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이 건물의 목재와 나무문은 빈틈없이 주사칠이 되어 있다. 이 건물의 북쪽 1칸은 온돌방이다. 이 건물과 북쪽 건물채와의 사이에는 좁은 틈이 있는데, 이곳은 낮은 흙담으로 메꾸었다.
안뜰의 서쪽을 막고 서 있는 부속건물은 전면 2칸, 측면 1칸 규모이다. 북쪽 1칸은 위아래로 분할되어 있는 헛간이다. 아래쪽이 2라면 위쪽이 1 정도의 비례로 공간이 분할되어 있다. 남쪽 1칸은 종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 남쪽으로는 측문을, 북쪽으로는 역시 2칸으로 위아래가 나누어져 있는 헛간이다. 높이의 비례는 옆의 칸과 조금 어긋나는데, 옆 칸 2층 헛간이 여기 작은 칸 2층 헛간으로 연결되어 있다. 작은칸 2층 헛간 부분은 다락방처럼 밖을 벽으로 막았다.
북쪽 건물채는 감로루 영역 제 4층의 기단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길쭉길쭉한 자연석을 대충 다듬어 4층으로 쌓아올린 위에 건물이 올라서 있다. 뜨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안뜰의 서북쪽 모서리 부분에 좁게 마련되었다.
북쪽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 정도의 규모이다. 서쪽 끝의 1칸은 부엌이다. 부엌 동쪽으로 붙은 두 칸은 방이다. 이 부분에는 앞으로 반칸이 좀 안 되는 마루가 있다. 두칸 방의 동쪽으로는 1칸 규모의 마루이다. 동쪽 끝 1칸은 방이다. 이 방의 앞으로 마련되어 있는 마루는 다른 것들에 비해 한 뼘 정도 높다. 마루 아래로 아궁이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길이 마루판을 태우는 경우를 피하기 위해 높이를 조금 끌어올린 것이라고 하겠다. 이 건물과 서쪽연결채 사이에는 좁은 틈이 있다. 이 틈은 그냥 열려 있어서 밖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원래는 아마도 밖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었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가 감로루에 갔을 때 그곳에는 70세의 박이한 이라는 분이 거처하고 있었다. 감로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분이었다. 이 분은 나를 붙들고 자랑을 하고 싶어 했다.
“루에 대해 많이 아십니까?”
박이한 씨가 말하였다.
“전국에 루가 많이 있어요. 그 중 첫째가 경복궁 경회루이고, 둘째는 대동강 부벽루, 셋째는 밀양 영남루, 넷째는 진주 촉성루, 다섯째는 남원 광한루, 여섯 번째는 삼척 죽서루--- 우리 감로루가 20위권 안에 듭니다.”
글쎄, 단지 루정으로서의 미학만을 따진다면 감로루를 20위권 안에 배치시킨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평가라 할 것이다. 감로루는 루정으로서 보다는 재사로서의 가치가 더 큰 것일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의민단
감로루 동쪽 측문을 통해 나가니 동쪽 산허리로 뻗어나가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이 감로루 영역을 벗어나는 부분에 북쪽 산록으로 비석 하나가 놓였고, 비석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의민단 義愍壇.”
종으로 쓰인 세 글자를 겨우 품고 있는 작은 비석이었다.
“무후한 분들을 제사지내는 곳이에요.” 박이한 씨가 쫒아 와서 설명하여 주었다.
박이한 씨에 의하면 이곳 주변 90만 평이 재사의 주인인 정랑공 문중의 소유라고 하였다. 정랑공 박종린은 함양박씨 금당실 입향조이다. 그의 생졸년은 1469년에서 1553년 사이에 펼쳐져 있다. 그가 타계한 1553년 이후 금당실 함양박씨의 역사는 45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 동안에 거의 모든 함양박씨들은 여기 감로루 주변에 묻혔을 것이니, 묘지의 숫자는 하나 둘로 그치는 것이 아닐 터였다. 그 무수한 묘지 중 무후하여 제사를 받지 못하는 것은 또 숫자가 얼마이겠는가? 그런 묘위들을 한 대 모아 여기 의민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문중에서 발전시켜낸 제사문화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정랑공과 그 후손들
의민단을 뒤에 두고 동쪽으로 나아가니 묘위들이 나란히 서 있는 묘역이 나왔다. 묘역은 마구 파헤쳐져서 을씨년스러웠다. 거금을 들여 재단장하고 있는 탓이었다. 석물을 들이고, 호석을 두르고, 석단을 쌓고 하는 묘역 정비공사는 여러 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조상의 묘역을 단장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생각 없이 이루어지다 보니 묘역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움의 미학을 크게 해치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는 것에 있다. 석물은 될 수 있는 한 옛 것 그대로 두는 것이 좋으며, 새로 석단이나 호석을 쌓을 때에도 옛 것의 냄새가 풍기는 것이 좋다는 미학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묘역 단장 사업은 묘역을 생경하고 낯선 것으로 분칠해 내기 십상이다. 여기서는 어떤 방식으로 단장이 끝마쳐질지 모를 일이다.
묘역의 제일 위에 있는 봉분은 정랑공의 것이다. 묘전비의 정면에는 ‘봉직랑 이조정랑 함양박공지묘, 공인 감천문씨 부좌’라는 글씨가 조금 크게 쓰여 있다. 정랑공이 감천문씨 부인을 얻어 처향으로 들어왔음을 알게 하는 명문이라고 하겠다. 비석의 후면에는 자잘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잘 알아보기 어려운 글씨였다. 그곳에는 묘지의 주인인 정랑공 박종린의 자字가 자용子龍이고, 함양박씨는 신라 박혁거세의 후예라는 등의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정랑공 묘 아래로는 쌍분이 연이어 붙어 있었다. 묘전비는 전면에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함양박공지묘, 증 숙부인 안동권씨부우’라는 글자만 쓰여 있고 나머지는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이었다.
그 아래로는 또 쌍분이 연이어 있다. 묘전비는 제법 알아볼 수 있는 명문들을 담고 있다. 여기 그 내용을 옮겨 보자.
“증 이조참판 함양 박공지묘, 정부인 평강채씨 부좌.
목(허목)은 사첨司瞻 박공을 서울 창선방에서 보았는데 온화하고 법도를 갖추어 사람들이 다 경모하였었다. 목은 마음으로 기뻐 그 만남을 잊을 수 없었다. 얼마 후 공은 영남으로 돌아가 타계하였고, 돌아가신 후 40년에 공의 둘째 자제를 만났는데 지금 전중군展中君(?)으로 일찍이 내시를 관장했었다. 선인의 풍모를 제대로 배워 목은 마음으로 기뻐하며, 훌륭하도다 사첨공이여, 자제를 이와 같이 현명하게 길러냈도다 하고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하루는 전중군이 왕부이신 참판공의 묘갈명을 마련하면서 목에게 그 묘지문을 보여주고 그 왕모이신 채부인의 사적을 덧붙여 달라고 청하였다. 그 묘지문을 보니 ‘공은 자질이 엄숙하고 행동이 견실하였으며 어려서는 도산 이선생의 문하에서 노닐었고, 스승이 돌아가신 후에는 월천 조선생을 모셨다. 그 학문은 가문에서 익히고 인간에서 펼친 것으로 모두가 실천 궁행으로 얻은 것에서 나온 것이며, 엄숙하면서도 법도가 있고, 즐기면서도 사랑함이 있는 것이다.’라 하였다. 목은 이것을 보고 사첨공의 가학이 연원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은혜를 받아 예에 따라 공에게 이조참판이 증직되었다. 공의 휘는 운蕓, 자는 사수士秀이다. 박씨는 본래 신라에서 나왔다. 고려시대에는 휘가 충좌忠佐인 분이 있으니, 숙왕肅王을 모셨으며 유학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공의 9세조이다. 증대부는 휘가 소종紹宗이고 이조 참의가 주어졌다. 대부는 휘가 눌訥인데 창락도 찰방이고 병조 참판이 증직으로 주어졌다. 부친은 휘가 종린인데, 봉직랑이고 이조정랑을 맡았다. 채부인은 대사헌 채침蔡忱의 손녀이고, 성균생원 채승선의 따님이다. 부인은 인자하고 근엄하였다. 참판공이 집에서 자제를 훈육함에 있어서는 내조의 공이 컸다고 한다. 부인은 난리가 지나간 후 큰 흉년이 들어 자식을 서로 팔아 먹을 때에는 친족 중 의탁할 데가 없는 사람을 여럿 거두어 기르기도 하였다. 돈독히 은혜를 베풀고 의리를 다하니 친척들 중 심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향년 96세로 타계하니 자손들이 앞에 가득하였다. 항상 훈계하여 말하기를, ‘사람으로 배우지 않는다면 담벼락과 같으니 너희들은 힘쓰도록 해라’하였다. 병이 나았을 때에도 독서를 격려하며 기쁜 얼굴로 말하기를, ‘내 뜻은 오직 이것뿐이다’라 했다. 공은 부인에 40년 앞서서 타계하였다. 3남3녀를 두었다. 큰아들은 수겸守謙이다. 둘째아들은 수의守誼인데 형조정랑이다. 셋째는守謹으로 사첨시 직장이니, 이것이 여기서 내가 사첨공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사위 셋 중 큰 이는 사인 김중웅이고, 둘째는 권도양, 셋째는 황유영이다. 자손은 아주 많아서 증 현손까지 백여 명이다. 명; 덕을 밟고 인은 잡고 우뚝 섰으며, 순일함은 일신에서 발하지 않더러도 그 후인들에게서 창성하리라.
양천 허목이 숭정 기원 후 3을미 5월에 짓고, 외손 한산 이완李埦 이 쓰다.”
정랑공 박종린은 박눌의 5남이다. 박눌은 김계행의 따님과 혼인하여 거린, 형린, 홍린, 봉린, 종린 등 다섯 아들을 두었다. 다섯 모두 과거급제를 하였다. 박종린은 앞에서 말하였듯이 감천문씨와 혼인하여 금당실로 입향하였고, 포苞, 지芝, 운蕓 세 아들을 두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