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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함께 걷는 길, 한국문단의 원로 김종길 시인(글/천남희_객원기자, 사진/박영대_동아일보 사진기자)

춘래불사춘, ‘성탄제’의 老시인과 만난 날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했던가. 날짜로는 이미 봄이 깊었건만 꽃도 새순도 이제나 저제나 눈치만 보는지 영 세상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겨우내 입었던 옷들도 아직 정리를 못하고 19년 만에 내린다는 4월의 눈을 보며 잔인한 4월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한줌의 햇살이라도 더 받으려고 몸부림치는 꽃눈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도 하다.
시인을 만나러 가는 날이라서 그런가? 주위의 모든 자연들이 어떤 느낌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았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시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좀 부담이 되는 취재길이었기 때문이다. 수유리는 초행길이지만 전화로 손바닥 보듯이 세세히 알려주셔서 다행히 찾아가는 데 별 문제는 없었다. 봄빛이 가득한 백운대 인수봉을 배경으로 한 그가 사는 동네가 어찌나 조용하던지 어느 집 한옥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청아하게 들리는 한적한 곳이었다. 그의 집 마당에 들어서니 햇볕이 따사롭다. 불어오는 바람도 제법 훈훈했다. 그 따사로운 햇살과 훈훈한 바람으로 인해 정원에 있는 메마른 가지에 곧 싹이 나고 꽃도 피면 나름대로 색과 향기로 자태를 뽐낼 날도 멀지 않아 보였다.

지례 출신 김종길 시인
김종길(87세). 그는 시인이자 영문학자이다. 안동 지례가 고향이며 이육사 기념사업회 초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었다. 그의 집에서 그가 손수 준비해 준 유자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를 나누기 전 2층 그의 서재를 먼저 보았다. 너무 오래되어 색이 누렇게 바랜 고서들로부터 갓 출판된 듯 한 책에 이르기까지 벽이며 바닥에 책이 쌓고 또 쌓아져 있었다. 그가 안내하는 방마다 책들이 가득하다. 늘 책을 가까이 하며 살아온 그의 삶이 선연하게 보이는 듯 했다.

“나는 지례에서 태어났지요. 지례예술촌에서 내려다보이는 남쪽 골짜기를 중간마을이라 했는데 우리집안이 거기서 살았고 내가 태어난 집은 그곳 왼쪽 산기슭에 있었어요. 우리 집은 한학하는 집안인데 나를 처음으로 신교육을 받게 한다고 학교 있는 곳으로 나간다는 게 청송군 진보였어요. 그게 1934년이야. 지례에서 큰 재를 두 개나 넘어야 진보가 나오는데 30리길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40리가 넘는 것 같아요. 안동이 60리 길이라 했고. 나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우리 외가는 영양군 석보 재령이씨 집성촌 이문열의 동네인데 어머니가 그 동네에서 태어나셨는데 내가 두 돌 지나 돌아가셨어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그런가 그냥 무덤덤하게 어머니 얘기를 하신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증조부, 증조모, 조모 세 분의 손에서 자랐다. 그의 증조부모께서 남매를 두셨는데 아드님(그의 조부)이 한 스물 전후에 돌아가셨단다. 그의 아버지가 종숙모가 되는 그의 조모에게 5촌 양자로 들어오신 것이다. 아버지는 젊으셨으니까 밖으로 주로 다니시고 집안 세 노인에겐 그가 첫 손자이자 증손자인데다가 두 돌 지나 실모를 했으니,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보살피며 아끼고 보듬으셨으리라. 그는 그 세 분이 아니었으면 못 살아났을 거라 했다. 더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네 살 무렵인가 폐렴으로 몹시 앓았는데 동네에서 모두 ‘저 집 귀한 자손 이번에 없앤다’ 할 정도였지만 세 분이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셔서 그가 살아났던 거란다. 그땐 산중에 병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아이들이 홍역이며 천연두 같은 여러 가지 전염병으로 희생되던 때이므로 세 분의 가슴졸임이 오죽했으랴 짐작이 가는 바이다. 그러다보니 그는 늘 세 어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증조부와 함께 자며 사랑방에서 지냈다.

증조부가 하시는 일이 항상 책을 보시거나 한문으로 글 짓고 시 짓는 것이었으니 그는 늘 그 모습만 보고 자란 것이다.
“내가 글을 배우기 전 너댓살 때인데 증조부가 종이에다가 다섯 자나 일곱 자로 써 놓으신 것이 무슨 게임처럼 굉장히 재미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5자 7자를 흉내를 내기도 했지요. 한번은 우리 큰 집에 제사가 들었어요. 증조부께서 제사에 참석하시고 음복 떡을 가지고 오셨어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웃묵에 송편 두 개가 있어 난 굉장히 좋았지. 그래 그걸 먹고 한시 흉내를 낸다고, 今朝月二食하니 腹中滿光明이라 (오늘 아침에 달을 두 개 먹었더니 배속에 광명이 가득하다)고 썼어요. 첫 행은 구문이 안 되지만 둘째 행은 시적인 사고를 보여주지. 그 후에도 내가 또 글 배우기 전인데 접붙인다는 행사가 있어 우리 동네의 글 배우는 아이들이 하루 백일장을 했어요. 나는 그때 정식으로 글을 배우기 전이라 큰 아이들이 하는 게 재미있어 보여 졸졸 따라 다녔지. 나중에 작품을 전부 모아 평가하는 접장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내 생가 할아버지가 접장이셨어. 당시 지례에는 ‘제청’이라는 집이 한 채 있었는데 널찍한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에 잠자는 방이 있는 건물이었어. 그날 행사는 거기서 했어요. 그날 시 제목이 ‘오류선생’이야 . 나는 글을 안 배웠으니까 오류선생이 누군지도 모르지. 그러나 글자는 아니까 어디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는 집 선생인갑다 했지 뭐. 나중에 애들이 작품을 제출하면 큰 아배가 -안동서는 할아버지를 큰 아배라 했지- 그땐 붉은 잉크가 없으니까 빨간 흙을 물에 개어 말이 안 되는 곳엔 비점을 찍고 좋은 데는 관주(동그라미)를 치고 하는데 나는 뒤에서 들여다보고 있었지. 내가 호기심 있게 들여다보니까 큰 아배가 ‘너도 한마디 할래’ 하셨어요. 그런데 내가 겁 없이 하지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불러보라 그러시대요. 그래서 내가 오류선생 댁은 문전이 청천지라 (五柳先生宅門前靑天地) 이래 썼다 말이지. 아 그랬더니 큰 아배가 ‘문전이 청천지’라 옆에 관주를 몇 개나 치면서 기뻐하셨어요. 나는 내가 지어 놓고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기상이 좋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옛날 중국 진나라 도연명 선생이 자기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놓고 스스로를 오류선생이라 불렀는데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글을 좋아하며 시를 지어 그 뜻을 즐기던 시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나 유고로 남긴 몇 편 안되는 시가 후대에까지 시인 묵객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이 그의 삶과 약간은 닮은 점이 있다. 그 역시 경북대, 청구대 고려대 교수를 근 40년 동안 하면서 거의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아서 많은 시를 쓰진 못했지만 그의 시 몇 편은 중학교 교과서(「성탄제」)와 고등학교 교과서(「설날 아침에」, 「저녁 해」) 에 실려 있다. 「성탄제」는 그가 27세 때 지은 시이고 「설날 아침에」는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을지로 입구로 가는 길목의 포스코 건물 앞에 시비로 세워져 있기도 하다.

1977년부터 살아온 수유리에 있는 현재의 집은 그가 35년째 살고 있지만 처음 지어진 그대로인 것 같았다. 집 내부가 여러 개 방이 양쪽으로 있는 복도식으로 된 아담한 2층 양옥집으로 마당엔 커다란 감나무를 비롯해 라일락, 자목련, 백모란, 산수유, 철쭉, 영산홍 등의 나무가 담을 따라 가지런히 심어져 있고 뜰의 잔디도 잘 가꾸어져 있었다. 직접 심은 것이냐고 물어 봤더니 이사 했다고 친구가 트럭으로 실고 와서 손수 심어 준 것이란다. 보는 것은 즐기는데 가꾸는 것은 잘 못하신다고, 그 뿐 아니라 기계 다루는 것도 잘 못하신다. 그래서 지금도 글을 쓰거나 시를 쓸 때 컴퓨터를 쓰지 않고 손글씨를 쓰며 핸드폰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단다.

그가 글을 정식으로 배운 것은 우리나이로 6살 되던 해이다. 그의 집안에서는 사내아이가 6살 되는 동짓날 입학을 시키는데 그는 정식 입학을 하기 전에 벌써 한자를 상당히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동네 청소년들이 식전에 그의 증조부한테 글을 배우러 오고 있어 그는 어릴 적에 증조부 옆에서 이불을 덮어 쓴 채 들여다보며 어깨너머로 한자를 꽤 많이 배웠단다,

“동짓날 입학을 시킨 것은 동지가 오행설에 의하면 하나의 양의 기운이 싹트는 날로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란 말이지. 그래서 우리 집안은 그날 입학식을 했는데 집안의 잔치로 집안 어른들이 모도 다 모이고 집전을 하는 분은 인근에서 학덕이 가장 높은 어른을 모셨는데 지금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의 조부인 수산(秀山)어른을 모셔왔지. 그해가 그분의 회갑년이었는데 내한테는 큰 집 할아버지가 되지. 그 분은 용모도 청수하고 글도 잘하고 인품도 고결하신 어른인데 입학식에서 있었던 일이야. 그 어른이 ‘하늘 천’ 하고 가르치면 내가 ‘하늘 천’ 하고 따라 읽어야 되는데 모르는 글자를 따라 읽으라면 따라 읽겠는데 뻔한 걸 싱겁게 따라 읽으라니까 입을 안 열었어. 그랬더니 옆에 있던 당숙들이 공갈을 하더라고. ‘너 안 읽으면 나중에 혼난다’고. 세 번을 되풀이 하셔도 내가 안 하니까 그 어른이 그만 포기를 하셨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어릴 적 그리움이 밀려오나 보다. 또 수산어른이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으니 철없던 그때의 무례함에 대한 송구스러움도 섞인 회한의 미소 일게다.
그는 늘 혼자 공부하기 어려운 학문을 배우고자 했었다. 나중에 서울에서 대학 공부를 할 때도 그런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그의 어릴 적 얘기를 좀 더 한 후에 언급하고자 한다. 그런 그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진보로 이사를 한 것이다. 그는 그것이 아마 그의 부친의 생각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증조부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 어른의 행장(사람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을 적어 놓은 글)에는 ‘증손 종길이 신학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탄식하여 말하기를 옛날 같으면 우리 집 한 가닥 글의 맥이 오로지 그에게 달렸었는데 이제는 글러버렸다’라는 구절이 들어있었단다. 그에 대한 기대와 집안의 문맥이 계속 이어지길 원했던 증조부의 안타까움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진보에서 생활하면서도 방학이면 자주 지례를 찾았었다. 그가 보통학교를 다닐 때가 일제 강점기여서 그는 중등교육까지 11년 동안 완전히 일본어로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시에 취미를 붙여서인지 작문 시간에도 운문으로 많이 썼다고 한다. 게다가 그의 둘째 외숙이 이병각 시인이었다. 외숙은 그때 ‘조선 중앙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는데 외가댁인 영양 석보로 가자면 안동에서 진보까지 버스로 와서 20리 길을 걸어가야 했는데 진보에 그가 있으니까 가끔 고향에 내려 올 때면 그를 찾아 중국집에 데리고 가서 짜장면도 사주고 석보로 함께 걸어가곤 했단다. 이십 여리를 손잡고 걸어가면서 ‘How do you do’ 같은 영어도 가르쳐 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또한 아동문학 잡지였던 <소년>을 1년 동안 그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조카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었기에 그를 무척 귀여워 해주었고 그도 또한 굉장히 잘 따랐었다. 또한 그가 공부를 잘하는 것을 알고 그에게 제일고보로 진학할 것을 권유했었단다. 서울 소격동 제일고보(현 경기중학교)앞에 외삼촌의 살림집이 있어서 그도 제일고보로 진학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일본에 굉장히 많은 책을 주문해서 읽었었다. 어릴 때부터 기억력이 좋아 한번 보면 거의 외우고 있어 당시 세계적인 유명한 건물이름이나 길이 높이 같은 것도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6학년 2학기가 되어서 교장실 옆을 지나가는데 당시 고바야시라는 교장이 잠시 교장실로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다.

“그때 진보초등학교는 한 학년이 한 클래스밖에 없었는데 진학을 안 하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진학 한다 해도 안동농림에는 더러 들어가고 대구사범이 특차인데 1등이나 2등이 가 봐도 된 적이 없었고 대구고보도 된 적이 없었어요. 그래 교장이 나보고 너는 진학을 할 것 같은데 어디 갈 거냐고 묻길래 난 제일고보 간다고 했지. 그때가 1940년이었는데 제일고보가 경기중학으로 대구고보가 경북중학으로 이름이 막 바뀌는 때였어. 교장은 정략적으로 나를 경북중학으로 보내려고 하는데 내가 경기중학으로 간다고 말하니까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내게 공갈을 하는 거야. 거기는 서울 애들만 넣어주는 학교라고, 그래서 내가 그럴 리가 있느냐, 시험에만 합격하면 넣어 줄 거 아니냐고 했더니 ‘이 녀석이 교장한테 덤빈다야’ 이런 식이야. 그래 놓고는 대구고보도 좋으니까 그리로 가라는 거야. 교장이 그러니 별수 있나 뭐 그리로 가겠다고 하고 나왔지. 그때 다른 인문중학은 2월 30일경에 원서가 마감이었는데 대구사범학교는 특차여서 2월 초에 시험을 쳤어. 그 학교에도 된 적은 없지만 해마다 한두 사람 시험을 치러 갔었는데 그해엔 우리 앞집에 사는 박상하라는 친구가 지원한다는 거야. 나는 사범학교에 갈 생각은 없었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날 부르시더니 앞집에 애가 시험을 친다니까 너도 연습 삼아 쳐 봐라 하시는 거야. 연습 삼아 치는 건 상관없지. 대구도 구경할 겸 시험을 친다고 했지. 그때 대구에서 군위 의성 청송 영양까지 들어가는 9명이 타는 합승이 있었어. 그걸 타고 갔는데 예비 소집일 날 가보니까 경쟁률이 10:1을 넘었고 나보다 덩치가 큰 애들이 많이 있었어. 그래도 나는 ‘시험 쳐서 내가 너들한테 질 줄 아냐’하고 속으로는 자신만만했지. 신문에 발표가 난 다음날 학교에 가니까 어떤 여선생님이 “오메데또” 그러면서 축하해 주는 거야. 그래도 난 그 학교 안 갈 거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진보에서는 대 사건이었지만“

그 무렵 그의 선친은 한약국을 잠시 했었다. 그의 선친은 한시를 잘하는 분으로 사람만 좋아서 모두 외상을 주고는 달라는 소리를 못하니까 한약국이 잘 운영될 리가 없었다. 또 그의 말대로 글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니 교통의 요지인 진보를 지나다니는 그 분의 친구들이 늘 찾아오곤 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그를 보살펴 주신 노인 세 분이 잇달아 돌아가셔서 그의 부친이 혼자 상주 노릇을 하느라 9년 동안 색복을 못 입고 매번 초상소상 대상을 다 치러냈다. 옛 말에 혼인 한 번 치르고 초상 한 번 치르면 시골의 웬만한 살림은 다 날아간다는 말이 있다. 손님들이 문상 올 때 제문이나 하나 지어오거나 와서 곡을 한번 구성지게 하고는 친구들이 다 모이니까 이틀 밤 사흘 밤을 놀다가 갈 때에는 또 행재를 줘야하니 웬만한 살림이야 남아 날 리가 있겠는가? 그가 진학할 무렵엔 집안 살림이 많이 안 좋았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더니 굉장히 심각하게 내게 통 사정을 하시대요. ‘나도 널 사범학교는 보내고 싶지 않다마는 지금은 형편이 너를 사범학교 보내기도 어려운 지경이다. 그러니 사범학교로 가거라’ 하시는 거야. 그렇게 심각하게 얘기하시기는 난생 처음이어서 따를 수밖에. 당시 사범학교는 수업료가 없는데다가 ‘관비’라고 해서 매월 얼마간 돈이 나왔었는데 나중에는 거의 하숙비만큼 나왔어요. 그러니까 돈이 제일 적게 든 학교라서 모두 가난하고 재주 있는 아이들이 많이 갔지.”

그렇게 사범학교 5년을 졸업하고는 지금의 안동초등학교로 배치를 받았었다. 그게 1945년 4월초였다. 그때 사범학교를 나오면 관비로 총독부에서 돈을 타서 썼으니까 2년 동안 의무적으로 교사를 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1학기를 마친 여름방학 때 해방이 되었으니 총독부가 없어지고 자연 2년의 근무연한도 없어져서 바로 사표를 내고 진학을 위해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가 서울에 올라왔을 땐 다른 곳은 학생모집이 끝났고 혜화전문만 남아 있었단다. 혜화전문은 신석초, 김달진, 서정주, 조지훈 등 우리나라의 유명한 시인들을 많이 배출 한 곳이기도 해서 시험을 쳐서 들어갔다. 그땐 제일고보에 오라던 그의 외삼촌은 돌아가셔서 친구와 함께 자취생활을 하다가 시골서 올라온 어느 집에서 아이를 봐달라고 해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집에서 학비를 보내줄 형편이 안 되니까 자력으로 해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혜화전문 입학식이 해방 되던 해인 1945년 11월 24일이었는데 들어간 지 한 달이 채 안되어서 겨울방학이 되어 한 학기가 끝났다. 1946년 봄 학기를 마치자 9월부터 해방 전에 전문학교였던 것이 4년제 대학으로 승격이 되어 혜화전문은 동국대학이 되었다. 학생들이 학부에 편입해 들어가자면 전문부 2년 과정을 마쳐야 했는데 그는 한 학년만 마쳤기 때문에 학부에 들어갈 자격이 안 되었다. 그러나 신은 늘 그의 편이었나 보다. 일제 강점기 때 인문중학이 5년 과정이었으나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니까 총독부에서 1년 을 단축시켜서 4년 과정으로 만들었는데 대구 사범은 여전히 5년으로 남아있어서 그가 5년 과정을 마친 것을 1년 과정으로 봐줘서 다행히 그도 편입시험을 칠 수 있었다.

“동국대 학부로 들어가서도 전문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로 많이들은 것이 양주동선생의 우리나라 고어나 향가 고려가요와 같은 고전강의였어요. 좀 건방진 생각이었지만 국어학이나 국문학은 집에 내려가서 아버지에게 한문이나 더 배우면 혼자 공부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혼자 하기 어려운 외국문학을 배우고 싶었어요. 아마 그때 내게 불어 소양이 좀 있었더라면 불문과에 갔을 거예요. 중등학교 시절에 문학소년으로서 특히 불란서 현대시를 좋아했으니까. 허나 영어도 시원찮은데 불어는 더 했지 뭐. 영어도 그땐 형편이 없었지만 그래도 영문과를 가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영문과에 가면 내가 영시를 할 거고 영시이론을 전공할 건데 우리나라에서 그 방면에 최고 권위자가 누구냐 수소문 했어. 그때 내겐 대학 간판은 관심이 없었고 문제는 지도교수였지. 수소문 끝에 고려대 영문과의 이인수 교수가 최고 권위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다시고려대 2학년 편입 시험을 봤어요. 그게 47년 8월인데 시험장에 갔더니 일본서 전문학교나 대학 다니다가 학병에 끌려갔다가 온 사람들이 일본 군복을 그대로 입고 시험 치러 온 사람도 있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아 그런데 다른 과목은 다 잘 쳤는데 영어시험이 굉장히 어렵게 나왔어요. 지금까지 시험을 쳐서 남한데 진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난생 처음 시험에 실패하나보다 걱정을 했지. 헌데 발표를 보러 갔더니 한 이십 명 시험을 쳤는데 나 혼자만 붙어서 편입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정말 공부할 사람만 뽑았지.”

그렇게 하여 그는 고려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정확히 1950년 5월 25일 딱 6.25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이었다. 그때 대학원이 처음 생겨서 그는 대학원에도 진학했었다. 그리고 전쟁이 난 것이다. 미처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던 그는 의용군으로 끌려갔는데 마침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탈출에 성공하여 기구하게, 그러나 무사히 대구까지 갈 수 있었다. 사변중이라서 취직을 할 곳도 없고 주로 통역 일을 하다가 1952년 봄부터 대구 공업고등학교 교사와 경북대학 사범대학 교양영어 강사를 동시에 시작하게 되었단다. 여기까지가 그의 어릴 때부터 학창시절까지의 이야기이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한 편의 긴 역사드라마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삶 자체가 살아있는 우리나라 역사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과 애착에 얽힌진솔한 회고담이 그의 부단한 노력과 함께 동향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그 후 그는 경북대 영문과 전임강사로 있다가 고려대 동기의 부친이 청구대학 학장이라 청구대학에서도 2년 남짓 근무 했으며 1958년 9월부터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로 33년을 재직하고 1992년에 정년퇴직을 한 것이다.

그는 교수시절에는 혹 강의에 소홀해 질까봐 시작 활동을 멈추었었다. 그래서 그는 시인이지만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집을 일곱 권이나 내었고 「시론」, 「언어와 진실」, 「시에 대하여」, 「시와 시인들」 등의 시론집과 우리현대 시나 한시를 영어로 번역하여 외국에서 상당히 호평을 받는 등 학자로서 시인으로서 정말 많은 일을 해왔다. 그가 처음 신학문을 배운다 했을 때 그의 증조부가 집안의 문맥이 끊어질까 염려 했다지만 그 길이 새로운 문맥을 잇는 길임을 그 어른이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지금 그의 자녀 2남 3녀 중 두 아들과 며느리 또 외손자사위 등의 자손들이 대학 교수가 되었고 손자나 손녀들도 모두 각 전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학업을 계속하고 있으니 한학자의 집안 자손으로서 그의 책임을 충분히 다 한 것 같다.

이 시대 마지막 선비 시인, 여전한 詩作 활동
그는 요즘 한 달에 시를 두세 편 정도 쓰고 있다고 한다. 교수로 있을 때보다 더 많이 쓰고 있다며 시를 쓰는 일이 즐거운 일이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단다. 시 한 편을 쓰는 것이 수많은 고뇌와 근력을 소모하는 일이지만 늘 좋은 시를 쓰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작품을 내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작품은 내지 말아야 한다는 평생의 지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긴 세월을 되돌려 보면 그에게도 아쉬운 것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신학문을 배운다고 진보로 나왔을 때 그의 증조부께서 왜 한문을 더 가르쳐 주시지 않았을까 지금도 굉장히 후회되는 부분이란다. 어릴 때 증조부께 천자문과 효경을 배운 뒤 보통학교에 들어가서는 더 이상 한문을 안 가르쳐 주셔서 배우지 못했단다. 그가 6학년 때 증조부가 돌아가셨는데 아침저녁으로 충분히 한문을 더 배울 수 있었다며, 그랬다면 한문의 기초는 완전히 닦지 않았나 하며 안타까워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신학문을 배우러 친구들과 몰래 서울로 올라 왔다가 수소문 끝에 찾아온 그의 증조부 손에 이끌려 다시 안동으로 내려가야만 했던 아쉬운 때도 있었단다. 그는 지금 한 달에 한 번씩 한시 동인회에서 한시를 짓는 모임에 나가는데 처음부터 들어가진 않았지만 1979년에 합류한 그 모임이 어느새 243회를 넘겼다. 한학과 신학문을 한 몸에 갖고 지금까지 온 그이지만 더 깊이 공부하지 못한 한학에 대한 아쉬움을 그는 그렇게 채워가고 있었다.
그와 얘기 하는 내내 옛 선비를 대하는 듯 했다. 그의 말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인자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평생을 꾸준히 자신의 길을 쉼 없이 걸어온 그의 삶을 얘기할 때 시와 예를 사랑하고 말과 행실이 일치했던 옛 선비의 곧고 어진 삶의 모습이 그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음이 느껴졌다.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것이나 자연을 즐기며 그 감정을 글로 표현하여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며 지금도 시작활동을 즐기고 있으니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진솔하게 얘기를 해 주신 김종길 시인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보듬어줄 다음 작품을 조심스레 기다려 본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39호>